귀엽고도 화려한
글을 쓴 덕분에 기분 좋았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잊고 살다가 한 번 씩 들춰보면서 씨익 웃게 되는 장면들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일기장에 쓴 동시가 학교 신문에 실렸던 게 첫 번째예요. 담임선생님이 사정상 출근하지 못하셔서 다른 선생님이 임시로 우리 반을 맡아주셨거든요. 등교하면서 낸 일기장을 하교할 때쯤 받아보면, 선생님의 칭찬이 길게 적혀있었습니다. 어린 저는 너무 신이 났고, 제가 쓸 수 있는 모든 장르의 글을 썼어요. 일기, 독후감, 동시, 콩트까지. 선생님이 그중 한 편을 (제게 얘기도 안 하시고) 해마다 발행되는 학교 신문에 실으셨어요.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아마도 그때가 제 글쓰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3학년 때 전학 간 학교에서 쓴 글이었어요. ‘장래 희망’이라는 제목이 주어졌고 신기하게 글이 잘 써졌던 기억이 납니다. 글에 대한 선생님 반응은 더 놀라웠어요. ‘어른이 써 준 거 아니냐’ 저를 의심하시더군요. 직접 쓴 글이라고 당당히 말하며 속으로 으쓱 했습니다. 원고지를 돌려주시면서 ‘알고도 속아 준다’ 선생님의 표정이 저에게는 금메달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제 결백을 끝내 안 믿어주신 것을 엄마에게 자랑하며 떠들었어요. 글짓기에 자신감이 붙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학년 초마다, 특별활동 신청란에 <글짓기반>을 적어 넣었습니다. 제일 자신 있었고 더 잘하고 싶었거든요. 수학경시대회에서는 모르겠지만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는 심심찮게 상도 받았습니다. 4학년 때 월간 학습지에 학교 소개를 기고했고, 5학년 때는 소년 OO일보 기자로 활동했어요.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글밥은 못 먹었지만 제법 경력이 있습니다. 껄껄.
중학교 때도 매년 교지에 제 글이 올랐고, 고등학교 1학년까지 그랬던 것 같습니다. 2학년 때는 교지에 제 이름이 없어서 되게 섭섭했어요 (C.A 시간에 작문반에 들어갔다면 글을 좀 썼을 텐데, 좋아하는 영어 선생님을 따라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회화반을 선택한 탓으로 해두지요). 그런데 거기 실린 글들을 읽어 보고, 곧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 축에 못 낀다는 걸 바로 인정하게 되더군요.
글쓰기와 관련된 마지막 추억은 고등학교 3학년 국어시간에 있었던 일이에요. 입시 준비에 찌든 우리에게 국어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는 굉장히 낭만적인 것이었습니다.
‘10년 후 나의 모습’을 그리고, 그림을 설명하라고 하셨어요. 반 아이들 한 명도 빠짐없이 교실 앞에 나와 발표를 시키겠다고요. 숙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아서 설렐 정도였어요. 저는 그때 한창 ‘보라’에 빠져있었거든요. 책가방, 신발, 카디건, 양말, 방석, 필통과 그 안에 들어있는 펜들까지 모두 보라색이었지요. 반 친구들이 보라색 물건을 주우면 무조건 제 책상에 올려놓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10년 후에는 더욱 보라색을 휘감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 발표순서가 되었습니다. 스케치북을 넘겨 ‘보라색 책 한 권’이 그려진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저는 보라색을 좋아해요 (아이들 웃음소리). 스물아홉 살이 되면, 책 한 권을 꼭 쓰고 싶습니다. 무엇에 관한 책일지는 몰라도 그 책의 표지와 속지는 모두 보라색일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책을 서점에서 만난다면, 꼭 한 권 씩 사 주세요!” (하하하)
장르는 모르겠지만 왠지 어엿한 출간 작가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글을 계속 쓸 테니, 책까지 내면 좋겠다 싶었어요. 정작 그 나이가 되어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만.
20년도 훨씬 지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도 쓰지 않고, 보라색도 끊었지만 아직 그때처럼 설렙니다. ‘이걸 써 보자’ 싶어 휴대폰을 붙잡고 동당동당 엄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면서, 저 지금 얼마나 재밌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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