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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쨈빵 Dec 04. 2022

여자 야곱 이야기

부끄러운 도망자



 

나이의 앞 자릿수가 바뀌는 순간이라 그랬을까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송구영신 예배시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올해는 제게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저보다 제 앞일을 잘 아시는 분께 웃기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내가 무슨 큰일을 낼 것 같았어요. 이왕이면 좋은 일이길 바랐습니다.      


그 해, 친구 몇 명과 교회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들의 결심이 이해되질 않았어요. 그냥 연애나 하지. 어쩌려고 저렇게 가정을 꾸리는지 궁금했습니다. “너는 왜 결혼을 하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너무 헛소리 같아서 참았습니다. 겁 없는 그들이 딱했어요. 그래도 부모님들에게 결혼 허락을 받은 것은 부러웠습니다. 나는 연애 허락도 못 받은 신세였으니까요.     


그렇게 11월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청년부에 내 또래 여자는 나랑 J언니 밖에 안 남게 생겼습니다. “너는 애인도 없어?”라고 자꾸 묻는 엄마의 질문도 좀 불편했습니다. 아빠가 공무원 퇴직을 앞두고 계셨거든요. ‘그동안 뿌린 봉투들을 회수하지 못하게 생겼으니 어쩌나’ 무척 안타까워하셨어요. 나는 생각했습니다. 축의금에 팔려 결혼을 하느니 독거노인으로 죽는 게 낫지!      


그와 10년 동안 만나면서 헤어지는 상상은 정말 많이 했지만, 결혼은 꿈도 안 꿨습니다. 그와 내가 결혼? 엄마가 들으면 뒷목 잡고 넘어갈 소리죠. 결혼, 결혼, 결혼... 부부가 되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와의 결혼을 상상했습니다. 어? 나쁘지 않아요. 진짜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와 부부가 된다면, 굶어 죽어도 웃으며 숨을 거둘 것 같았어요. 갑자기 너무 결혼하고 싶어 졌습니다. 엄마가 반대하면 10번, 20번이라도 말을 해서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막 솟아올랐어요. 와. 그가 나를 사랑하는 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끝까지 반대하시면 진짜 독거노인 되지 뭐!!     

금요일 낮에 그에게 말을 했습니다.

“나, 결혼하고 싶어. 오늘 엄마한테 결혼한다고 할 거야.”  

“어... 어....?”      


너무 떨려서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머리가 저리다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밤이 됐습니다. 우리 집 현관문에 들어선 시간이 10시쯤이었습니다.      


아빠, 엄마, 남동생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TV를 끄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했습니다.     


결혼을 하겠다고 했고, 엄마가 누구랑 할 거냐고 했고, 내가 그 사람이랑 할 거라고 했고, 미쳤냐 돌았냐.. 길고 긴 욕을 먹고.. 우와.. 몇 대 맞고, 울고... 옷을 잡고 흔들고, 계속 울고..


그러다가 약간 진정이 됐을 때,

“사실 나는 전혀 결혼을 하고 싶지가 않아. 근데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그 사람이랑  아니면 평생 결혼 안 할 거야!”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기엔 상황이 너무 험악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진심이 튀어나가 버렸어요.. 엄마는 멈칫했습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생각이 안 나요. 아무튼 나는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잠시 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너 진짜 결혼할 거야?”

“응”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할래?”

“진짜?”

“응. 할 거면 빨리 해!”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축의금 덕분입니다. 하하하. 기가 막혀서 막 웃었습니다.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알겠답니다. 하하하하.

엄마한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랑 사모님, 내일 시간 되시면 만나자고 그래!”     

바로 다음 날 토요일 12시에 상견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딱 3주 후 토요일, 12월 3일에 우리는 그해의 끝을 잡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했다는 게 실감이 안 됐습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모습이 놀랍다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진짜, 응답은 한순간이야!”

아마도 그는 우리가 결혼하기를 기도했었나 봅니다.      


되짚어볼수록 내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거짓말로 산 10년 세월이 너무 비겁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서가 무서워서 잔머리 굴리고, 두려워서 도망 다니던 야곱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수 없을 것 같아, 저 혼자 이런 수, 저런 수를 쓰느라 고단한  거짓말쟁이 야곱 같던 나,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이삭과 에서를 더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내가 우리 엄마를 속였던 미련한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엄마가 더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도망 다녔습니다.      


결혼해서 가장 좋은 점은 오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Freedom! 겹겹의 거짓말로 엮인 올무에서 벗어나 꿀 같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언제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걷혔습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어리석은 세월을 회개했습니다. 끝내 서로를 선택한 것은 우리 두 사람이지만, 드라마틱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땡큐 소머취!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놀라운, 결혼 성공기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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