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쨈빵 Feb 15. 2023

섭섭섭섭섭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여

      



그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을 했습니다. ‘엄마의 반대’라는 높은 벽을 절대 넘을 수 없을 테니까요.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만에 하나 우리가 부부가 된다면 그건 분명히 하나님이 ‘특별히’ 손을 써주시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건 예수님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거야.” 당시의 남자친구를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몰래 연애’ 10년 만에, 극적으로 결혼 허락을 받았습니다. 대출을 받아 19평 아파트 월세 보증금을 하고, 친정 엄마가 다른 집으로 이사하시면서 물려주신 오래된 가전제품으로 신혼집을 채웠어요. 그래도 전혀 초라한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반지 하나씩 나눠 낀 것만으로 충분했어요. ‘아마도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결혼을 잘하는 사람일걸!’ 가진 게 없고 수입이 적어도, 자신만만 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당연히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 2년 동안 자연 임신이 되지 않았지만 괜찮았어요. 어차피 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양가 부모님들도 아무 소리 하지 않으시니 좋았어요. 이대로 무자식상팔자를 누리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셋째를 출산한 가정에 심방을 갔던 날이에요. 아내 집사님이 나에게 신생아를 안아보겠냐고 하셨습니다. 싫다고 할 수 없잖아요. 어우, 아기를 받아 안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예뻐서 죽을 텐데, 그때는 그런 걸 몰랐어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몸집이 꽤 커서 놀랐습니다.      


산모 집사님은 부부에게 자녀가 생기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한참 말씀하셨습니다. 아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우리를 일깨워주고 싶으셨나 봐요. 동생을 바라보는 그 집 첫째와 둘째의 덤덤함과는 상반되게, 두 분 집사님은 행복해서 견딜 수 없는 얼굴이셨어요. 그 기분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열정적인 설득에 넘어간 걸까요. 다세대 주택의 좁은 철문을 나오면서 ‘혹시 엄마가 된다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3주 후,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보았어요.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두 분은 거의 만세를 부르셨습니다.      


만삭이 되니까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나와서 어떻게 누워도 불편한 탓지만, ‘말 안 듣는 왕고집쟁이가 태어나면 어쩌나. 심각하게 못생긴 얼굴이라도 내가 예뻐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느라 더 그랬어요.      


첫 출산을 하고, 산부인과에서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이었습니다. 신생아를 겉싸개에 감싸 안고 바깥을 내다보는데, 횡단보도 앞에 초등생 아이가 서있었어요. ‘저 아이도 엄마가 어마어마한 진통을 하고 낳았겠지. 귀한 사람이야. 곱게 잘 컸으면 좋겠다!’      


첫째 돌이 지나서까지 남편은 교육 사역을 했어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들이 아기 백일을 축하해 주러 오셨습니다. 원룸과 다름없는 좁은 집, 아기의 50일 사진 롤스크린이 한쪽 벽을 가득 채웠어요. 그중 한 분이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와, 애 사진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아빠 엄마 눈에 애밖에 안 보이는구나. 이거 완전 우상이네. 우상!” 하하하하. 마음 한쪽이 뜨끔하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진이 주책없이 크기는 했어요. 하하하. 우리가 그랬습니다. 아기 중심으로 살았어요.   

  

모유수유가 얼마나 힘든지, 아기가 젖을 먹는 게 아니라 피를 빠는 것 같았습니다. 잘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에게 맞추느라 고단했어요. 그래도 얼마나 예쁜 지. 이 세상 어느 집에도 없는 보물이 딱 우리 집에만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도 가져갈 수 없는 보물이요. 집사님들이 그렇게나 행복해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연애 시절, 그는 섭섭해하거나 기분 상할 것 같은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남자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언제나 의기양양했던 나였습니다. 첫 아이 돌이 지나고 나는 하던 일을 그만뒀어요.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삶이 시작됐지요. 일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문자메시지를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전화 통화는 그가 걸어올 때만 했고요. 아기의 일과와 그날의 ‘작은 발전’이 대화 내용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나에게 고생했다 애썼다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어요. 점점 내 말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별 것 없는 하루를 일일이 얘기하는 게 나도 점점 구차했어요. 아기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육아 스트레스가 꽉 차서 견딜 수 없던 어느 날, 그에게 말을 했습니다. “나, 애 키우는 거 너무 힘들어. 내가 아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 같아. 자신감도 없어지고 기분도 울적해.“


“그런 건, 당신 혼자 알아서 해결해. 언제까지 내가 다 들어주고 받아줄 수는 없잖아.” 그가 대답했어요. 오래도록 변함없이 다정했던 남자친구는, 무심하고 냉정한 남편이 돼있었습니다. 당황스럽고 섭섭했어요. 이제는 본인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잖아요. 징징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힘들어. 힘들어’ 했으니, 푼수 짓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어요. 그동안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건 사실이었거든요.     


남편에게 속얘기를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애 때 시시콜콜 모든 것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달라졌어요. 나중에 들었지만, 그 당시 남편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답니다. 육아로 힘든 내게 털어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혼자 삼켰대요. 그도 나만큼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말을 하지 않아서 서로의 상태를 몰랐습니다.      


남편도 나도 힘든 얘기를 잘하지 않았습니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서로를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련하게도 각자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줄을 몰랐어요. 부정적인 내용의 대화는 안 하는 게 낫다 여긴 거죠. 꾹꾹 참아가면서, 남편에게 마냥 섭섭해만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의 코디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