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테와 삽니다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옷 색깔은, 다섯 가지를 기본으로 한다. 베이지, 네이비, 그레이, 브라운, 카키. 여기에 체크나 플라워, 스트라이프 등의 패턴(무늬)을 곁들이면 무난하면서도 취향이 반영된 옷 입기가 가능하다. 선명한 원색, 밝은 파스텔톤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의 색감을 선호한다.
(순우리말 명칭을 쓰면 'Fashion, Style'의 느낌이 안 살아서 부득이하게 외래어를 남발한다. 아마도, 이 글이 끝날 때까지)
다가구주택에 살 때는, 볕이 좋은 날에 빨래를 옥상에 널곤 했다. 따로 표시를 안 해도 우리 집 빨래는 구별이 됐다. 안주인 취향이 확실한 관계로, 우리 집 물건은 일관된 느낌, 통일된 색감을 유지하는 편이다. (가격이 안 맞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당장 필요한 물건이라도 사지 않는다. 소비의 완성은 '자기 만족'이니까)
남편의 옷 서랍 안에도 고만고만한 색상의 옷들이 정돈돼 있다. 계절에 따라 두께나 소재, 길이만 달라진다. 80% 이상 할인된 이월상품을 온라인으로 구입하거나 재활용 매장에서 새 제품 (또는 구제품)을 구입한다. 보통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류비가 1-2만 원 정도. 이 옷들로 옷 잘 입는 사람 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상, 하의 조합만 잘한다면 옷 못 입는 사람이 되기도 힘들다(고 자부한다).
이 남편이 옷을 어떻게 맞춰 입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믹스&매치 코디법을 수차례 주입(?)시켰지만, 그의 최종 픽은 대부분 미스매치다.
그레이+그레이 : 오늘은 어느 절로 출근을 하시는 겁니까. 근데 당신 목사 아니에요?
네이비+네이비 : 이런 식으로 시선 강탈하는 것도 재주요.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뻔했다는.
베이지+베이지 : 거대 누렁이인 줄. 차마 짖어보라고는 못 했으나, 진심 놀랐소.
브라운+브라운 : 나를 웃겨주려는 마음이었다면 고마워요. 이 정도로 웃을 줄은 몰랐겠지만.
체크+체크 : 하나가 패턴이면 하나는 단색! 유 노? 온종일 놀림감 될 뻔했는데, 내 덕에 산 줄 아시길.
카키+카키 : 강철부대세요? 밀리터리룩으로 가시려면, 볼록한 배부터 정리를 하셨어야지.
어느 금요일 저녁예배에는 어두운 카키 바탕, 붉은 체크 셔츠 위에 선명한 홍점이 박힌 새파란 타이를 매고 강단에 섰다.
와,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하고 실력 발휘하셨구먼. 셔츠와 타이가 맹렬한 기세로 색감을 뿜어낸다. 사전 예고도 없이 예배 시간에 이렇게 웃음 공격을 한다고? 그래, 옷이 뭐 중요하냐. 으흐흐흐흡. 근데 이 웃음 어떻게 참아요? 누...눈물! 으흐흐흑...
그는 귀찮다. 내가 생각해서 맞춰 입는 거라고. 이렇게 입으면 안 돼? 응, 안됩니다. 에이 몰라, 그냥 갈래. 누렁이가 출근을 한다. 으흐흐흐흐. 나 좀 살려주세요.
위험하게(?) 입고 나갈 수 있으니, 가능하면 나에게 한 번 검수를 받는 편이다. 하지만, 서둘러 외출해버리는 날에는 나도 모르겠다. 밖에서 만나면 최대한 안 놀라고, 안 쳐다보고,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벌써 입고 돌아다니는 걸,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의류 구입 방법이 같으니, 우리 식구 중에 패피('패션피플'의 준말)는 있을 리가 없다.
아니지. 연예인들 보니까 청청 패션으로도 입던데?소멸할 듯 작은 얼굴에 길고 긴 다리를 가진 청년이 위아래 베이지로 맞춰 입은 걸 본 것도 같다. 그렇다면 그의 과감한 색깔 맞춤은 혹시?
어쩌면, 패테('패션 테러리스트'의 준말)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진정한 패션리더일지 모를 일이다.
여보, 아무리 그래도... 화이트 리넨 셔츠에 블랙 져지 트레이닝 바지는 너무 한 거라고. 물론 나는 당신이 그렇게 입은 걸 못 봤지만. 맞아, 아무것도 못 봤어. 이것도 그냥 속으로 하는 말이고.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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