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잘 들어봐
손바닥 발바닥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만 기운이 빠져나간다. 어쩜 이렇게 아무 의욕이 없는지. 하루 종일 개미 소리로 말을 하고, 앉아있을 힘도 없이 흐느적거린다. 나이 마흔에 한가닥 정신력조차 남지 않은 내 모습이 애처롭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져서, 주책맞은 걱정들만 자꾸 달라붙는다. 이렇게 비실거리니 아무래도 내가 남편보다 먼저 주님 곁으로 가겠지 싶다. 코끝이 찡하다. 청춘 봄날 아낌없이 사랑했으니, 이별도 꽃 질 때처럼 기껍기를.
여보,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유서라도 남기듯 마음속 편지를 쓰고 지우며, 나 혼자 울컥울컥 청승을 떤다. 아토피와 오래 싸우면서 체력을 소진했다.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졌고, 무기력과 우울감에 자주 졌다. 체력이 바닥에 붙어, 집안일은 커녕 정신줄 잡을 여력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되도록 말을 들어주고 뜻에 맞춰주려고 애썼다. 엄마 노릇 아내 노릇 하는 것도 없으니, 말이라도 부드럽게 해주려고 했다. 혹시라도 내가 일찍 가버리면, "고마워. 미안해." 하는 말이, 나 대신 남아서 식구들을 위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지는 상상'을 반복하다 보니, 실제적인 준비를 해둘 필요를 느낀다. 보험금이 조금이라도 나올 게 있을지 모르겠군. 일단 집 정리부터 해야지. 옷이나 살림을 최소한만 가지고 살아야겠다.
'눈 앞을 오가는 사랑하는 저들과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민망스럽지만, 당시의 나는 진지했다. 마음의 병은 이렇게 밑도 끝도 없다.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내용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없어도 잘 키워주실 테니 염려 않는다. 아무래도 남편은 재혼을 해야겠지? 아직 젊고 애들도 어리니까 혼자서는 무리야. (사이가 좋았던 부부일수록, 사별 후 재혼을 빨리한다는 근거 모를 설說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 여보, 얼른 새 출발해라. 내가 없다고 당신 남은 인생이 힘들 필요 없잖아. 에고, 눈물이 주룩 흐른다. 속으로만 이럴 게 아니라, 미리 남편에게 언질을 줘야겠다. 내가 떠난 후, 어쩔 줄 몰라할 그를 떠올리니 가엾다. 사별한 전처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해주고 싶다. 그의 마음 불편하지 않게, 내 마음을 담아 따뜻하게.
며칠 후 저녁, 남편이 동네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온종일 집에서 쓰러져있는 나에게 불평 한마디 없는 고마운 사람, 나를 '리프레시'시켜주려는 그의 배려가 마음에 닿는다.
걸으면서 준비한 말을 할 타이밍을 찾는다. 벌써 가슴이 쿵덕거리고, 목구멍이 흔들린다. 이러다 목소리가 떨리겠어, 침착하자!
"여보."
"응?"
"혹시라도..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당신 재혼해."
"......?"
"그냥 미리 얘기해두는 거야. 재혼하라고."
웁스. 눈물이 나고 난리다.
("무슨 소리야." 할 줄 알았다)
(근데 아니고)
내가 알아서 할게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 어??!!"
"그땐, 당신 어차피 없을 거잖아. 으헤헤헹~!!"
'아오!!! 근데 이 사람이!'
(등짝에 풀파워 스매싱을 날렸다.)
"아!! 왜~~ 내 말 맞잖아~~ 으헤헤! 으헤헹~!"
(내 손을 피해 잘도 도망 다닌다.)
이리 와라!!
우와~ 나, 눈물 쏙 들어갔어!
오지랖 떨다가, 한방 먹었다. 아, 약 올라!
한방 덕분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그만 훌쩍거리고, 이 사람이랑 재밌게 살아야지. 남은 인생 얼마인지 모르지만, 아까운 시간 그만 날리자. 눈에 힘을 빡 주고, 정신을 차려 봐야겠어!
(생각할 때마다 기운이 솟는 명장면이다. 리프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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