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중앙서림 이야기
한옥집에서 나와 도립병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5분쯤 걸어가다보면 큰길이 나왔다. 거기에서부터는 제법 큰 서점도 몇 개 있고, 길 건너편에는 성심당 빵집도 있고, 어릴적 다니던 서예학원도 있고, 또 반대편으로 쭉 올라가면 끝에는 엄마가 근무하시는 중학교 고등학교도 있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집 앞 골목 끝의 분식 포장마차.
내가 바로 바지에 뜨거운 것이 흘렀던 그 골목 끝에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핫도그와 호떡을 파는 곳이었다. 다른 것도 팔았을 것 같은데 늘 핫도그만 먹어서 다른 건 기억이 안난다. 모두 다 알고 계실 그 옛날 핫도그. 튀김기에 잔뜩 꽂아놓고 튀기는, 분홍색 손가락 소세지에 밀가루를 돌돌 묻혀서 튀긴 후 설탕이랑 케찹을 듬뿍 뿌려주던. 50원쯤 했던가.
그 핫도그가 너무 맛있어서 할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해서 매일 사먹으니까 엄마가 아주머니께 미리 말씀드려서 아무때나 가서 먹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그 때 살이 갑자기 쪘었던 듯도.
두번째는, 우리집에 세들어사시던 화연언니와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도립병원 안에 있는 매점. 그곳에는 주로 심심할 때 놀러가곤 했었다. 언니 어머니가 과자랑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시면 먹으면서 오기도 하고.
그리고 세번째.
바로 오늘 이야기의 테마인 ‘중앙서림'이다.
중앙서림의 주인 아주머니는 엄마랑 같이 여중에 근무하셨던 국어선생님이셨다. 여러가지 이유로 선생님을 그만두시고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 어린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분이었고, 우리엄마는 왜 선생님을 그만두고 서점을 하지 않으실까 늘 불만이었다. 아줌마는 짙고 큰 검은 눈에, 역시 까만 머리칼이 풍성한, 차분한 분위기의 분이셨다.
지금도 도서관에 가거나 서점에 가길 좋아하는 나의 습성은 아마 그때부터 형성되었나보다. 처음에는 엄마를 따라, 후에는 나 혼자 중앙서림에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던 그 책의 향기!
메인 판매대에는 문제집이 깔려있고, 그 오른편은 온갖 시집과 책들, 왼편에는 어린이 섹션. 지금도 선명한 책의 위치와 손님들의 움직임과 책장의 모습들.
안쪽에 있던 계산대와 아줌마의 자리. 옆에 나를 앉혀주시던 작은 동그란 의자.
그 작은 문을 통하면 뒷쪽으로 아줌마의 살림집이 있었다. 그리고 착하고 말이 없던 두 오빠들.
나의 자리는 주로 어린이 책 섹션 구석탱이였다.
온갖 어린이 잡지들. 만화책들. 어린이 책. 명랑소설 등.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흐뭇해지는 나의 세계.
틈만 나면 그곳에 가있곤 하던 나는 중앙서림의 단골손님이자, 애물단지이자, 아줌마의 친구였다. 맨날 와서 만화책이니 책들에 손자국을 남기고 가는 내가 마냥 예뻤으랴마는 아주머니는 단 한번도 싫은 소리 눈치 한번 안 주시고 늘 너그럽게 날 반겨주셨다. 가끔은 전화를 대신 받으라고 심부름도 시키시고, 날이 추우면 난로 옆에 와서 앉아서 보라며 간식도 챙겨주셨다.
언니들이랑 같이 가 있던 기억이 많지 않은걸 보면 아마 그 때도 내가 제일 책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기억에 남는 책들이 너무 많은데, 그 당시 유행했던 만화책 시리즈.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꺼벙이 캐릭터나 로봇같은 캐릭터. 그리고 역사만화도 있었고, 무엇보다 명작 ‘유리의 성!’ 이 만화를 운명적으로 처음 만난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서점의 바닥자리가 주는 편안함과, 책냄새의 황홀한 매력을 나는 이미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서점 주인이 되고 싶었던 희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놓아본 적 없는 나의 꿈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한가지!
작은 언니의 만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도 중앙서림 바닥에서 철푸덕 앉아 책의 세계에 빠져있던 나.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집에서 언니가 전화를 했다고.
-여보세요? 왜?
-수진아. 큰일났어. 빨리 와
-왜 그래?
-집에 불났어!
짧은 순간 내 머리에 스쳐간 온갖 구문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깨나 불조심.
설마하며 버린 불씨 평생후회 불씨된다.
그당시 얼마나 학교에서 불조심 화재예방 교육을 철저히 시켰던지, 언제나 내 머리 속에는 불에 대한 공포가 심어져 있었다.
화재는 곧 불행의 씨앗.
엄청난 재앙.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극심한 공포와 연결되어 어떤 트라우마 비슷하게까지 내재되어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작은언니의 그 한마디라니!
전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읽던 책도 던져놓은 채 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집이 탄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담긴 아름다운 집이 타버리다니. 도립병원을 통해 가는 지름길을 통해 달리는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떻게 물을 부어 집을 살릴 것인가. 백미터 달리기 23초의 엄청난 굼벵이인 내가 일생동안 가장 빨리 달려본 경험인 듯하다. 숨을 헐떡이며, 공포에 질려 집 문을 열고 들어선 그 순간.
집안은 고요했다.
생글생글 웃는 작은언니.
- 왔어? 심심해서 너 빨리 오라고.
불이 안나서 다행이긴 했으나,
그 순간의 허망함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언니 죽었어!
이민와서 사는 삶 중에 가장 슬픈 점을 꼽으라면, 한국책이 잔뜩 꽂혀있는 서점과 도서관의 향기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점이 그립다.
아름다운 우리글로 쓰여진 책이 온 군데에 보이는.
책 냄새와 활자냄새가 나를 끌어당기는.
책방이 그립다.
몇 년 전.
중앙서림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엄마를 통해 들었다. 물론 중앙서림은 이미 오래전에 접으셨고, 다른 장사를 하고 계셨지만, 나에게 그 분은 언제까지나 맘씨좋은 중앙서림 아줌마이셨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어린 나에게
책의 아름다움과 꿈의 세계를 맘껏 맛보게 해 주신
책방 아줌마.
그 거리.
중앙서림.
그곳에 들어서
책가방을 내던지고 앉아서 책을 읽던 그 소녀도.
어디 있을까
소녀가 읽던 그 책들은
또 어디 있을까
어디선가 헌책방을 떠돌고 있을까
소녀의 어린 시절을 안에 품은 채
*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