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않은 약속. 갚지 못한 오백원.

21. 그림방

by 밤호수

소설 ‘데미안'에서 어렸던 싱클레어에게 처음 환한 낮의 세계가 아닌 밤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준 존재는 자신의 작은 거짓말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내가 스스로의 악함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한옥집 세계 너머 어두운 세계가 공존함을 느끼게 해 준 계기는 약속이었다.


지키지 않은 약속.



나는 그림을 참 못 그린다.
지금도 못 그리고, 어릴 적에도 못 그렸다. 미술 시간이 되면 항상 작아졌다. 그렇다고 ‘어릴 적에 학원이라도 좀 보내주지' 말을 할 수도 없다. 내 기억으로 나의 첫 미술학원 이후 나는 다시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초등학교 입학도 전이었다. 언니들도 다 다녔던 미술학원.
아마도 ‘개나리 미술학원'이었을 게다. 엄마는 그곳에 나를 등록해 주셨다. 한옥집에서 나와 도립병원을 끼고 골목을 나온 후 중앙서림 방향으로 쭈욱 걸어나와 다시 엄마 학교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2층에 개나리미술학원이 있었다.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림그리는 것을 원래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어느날 선생님은 나에게

준비물로 가져올 것들을 알려주셨다.
스케치북 하나. 4B연필 하나.

뭐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미술학원을 나와 조금 걸어내려오다 보면

건넌편에 ‘그림방'이라는 화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사면 된다고 하셨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그림방에 들렀다.

‘그림방'이라고

자그마하게 쓰여진 그 화방은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까만 색 간판에 흰 글씨는 무척 세련돼 보였고,

자그마한 안쪽 공간은 신비로워 보였다.

‘그림방'이라는 이름조차,

그 분위기에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당당하게,

생전 처음 나에게 부과된

‘그림재료구입'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림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갈하고 깨끗한 도화지들.
색색의 아름다운 펜들.
순서 하나라도 잘못 배열되면 절대 안될 듯한
가지런한 물감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분위기에,
그 멋진 매력에
나는 압도되고 말았다.

“그림연필 한 개.
스케치북 하나 주세요.”

자랑스럽게 받아든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주머니에는 그만한 돈이 없다는 걸.
연필만 사고 나오면 되었을 텐데.
나는 스케치북을 놓고 싶지 않았다.
생전 처음 들어온 그림방에서 받아든
새하얀 스케치북을 왠지 모르게 꼭 쥐고 있었다.
그걸 본 주인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다음 번에 오백원 가지고 와.

오늘은 그냥 가져가고. 알았지?”

약간은 꺼림칙한 마음과
약간은 얼떨떨한 상태로
나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나왔다.
들고 나왔다는 승리감과 함께
왠지 불안함이 엄습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하고 오백원을 받아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나는
그 순간부터 500원과 그림방에 대해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지금도 매일 잊어버리듯이.
그때도 그렇게.


다음날 학원을 가는 길.
멀리서 그림방이 보이자 그제서야
퍼뜩 생각이 났다.
아 … 500원..
어린 나에게 500원은 무척이나 큰 돈이었다.
그걸 안 가져오다니.
두려웠다.
일부러 멀리로 돌아갔다.
그것도 아주 빨리 뛰어서.
학원을 갔다 오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500원을 들고 그림방을 가지 않았다.


첫 날에는 잊어버려서였지만
다음날부터는..
난 이미 약속을 안 지켜서
가면 혼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경찰에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것과 상관없이.
이미 두려움과 공포는
나를 그곳에 가지 못하게 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와버린 길이 너무 두렵고 멀어서
더이상 엄마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밤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멀리서 그림방이 보일 때마다
아주 멀리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혹시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볼까봐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를 졸라 나는 학원을 그만뒀다.

공포는 몇 년 간
계속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검은 색의 두려움.
사랑받는 막내로 어리광을 부리며
한옥집에 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남의 돈을 훔친 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안다는 두려움.

원래도 그림에 흥미가 없었지만
그 이후 다시는 미술학원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간
그림방을 지날 때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분명히.
확신하건대.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그 아무리 멀리서 뛰어가도
날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중학생이 된 나.
서울로 전학을 간 뒤
다시 고향에 놀러왔을 때.
나는 그곳을 찾았다.

무엇을 하려고도 아니었고

돈을 갚으려 한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을 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더이상 그림방은 없었다.


만일 있었다면

열다섯의 나는

용기내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열다섯의 나는

공포를 이겨낸 어른이었을까

여전히 갚지 않은 오백원이 두려운

아이였을까.


하얀 스케치북.

그와 번대로
처음으로 경험했던
유년의 그림자는
갚지 못한 오백원과 함께
그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내 안의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