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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탈주사건과 닭 잡아먹은 일

22. 애완동물의 꿈

by 밤호수

미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뉴욕 롱아일랜드의 기숙사 건물은 낡고 쓰러져가고, 물이 아래층으로 새는 열악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이 어릴 적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가을이 되면 기숙사 앞뒤의 나무들에 바삐 오가는 다람쥐들은 큰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도 아이를 친구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이곳저곳 겨울을 위한 먹이를 준비하러 바쁜 다람쥐들을 종일 쳐다보던 큰 아이는 손수 도토리를 다 주워서 쌓아놓곤 했다. 다람쥐들을 위한 거라며. 그리고 숨어서 그들이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릴 적 나의 다람쥐의 기억을 생각했다.



한옥집에 살던 그 시절. 우리집은 늘 개를 키웠다. 요즘 키우는 애완동물 개념이라기보다는 마당에 풀어 키우는 집동물 느낌의 개들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던 작은 언니는 애완 느낌의 작은 동물들을 늘 기르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시장에 갔을 때, 조르고 졸라서 다람쥐 한 마리를 사온 것이다. 시장에서 다람쥐도 팔았다니 신기한 일이다. 의기양양하게 다람쥐를 데리고 온 언니는 같이 사온 다람쥐 집을 안채의 마루 아래 내려놓았다.


아주 작은 다람쥐였다. 과연 이 다람쥐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를 거쳐서 이 한옥집에까지 오게 된 걸까.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신통방통했다.

우리에겐 귀엽고 앙증맞지만 불쌍한 다람쥐는 이 나무가 가득한 집 안에서, 나무 한번 타지 못하고, 작은 집 안에 갇혀서 온종일 쳇바퀴를 돌았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쳇바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그 때 깨달았다. 어항에서 물고기가 온종일 끝에서 끝을 왔다갔다 하듯, 다람쥐도 종일 쳇바퀴를 돌았다. 우린 그게 그렇게 재밌어서, 그 앞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단의 묘기도 그보다 재밌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온 동네의 아이들이 다람쥐 구경을 왔다. 기본 몇 명씩은 다람쥐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를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인기 폭발 다람쥐였다.

하영이.
뒷집 관사에 살던 작은 여자 아이 하영이는

특히나 다람쥐를 좋아했다.
서너살이나 되었을까.
그 아이는 눈만 뜨면 우리집에 와서
다람쥐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 다람쥐가 불쌍해

하영이는 그렇게 말했다.
한참을 그 앞에 앉아있다가. 한번씩 그렇게 중얼거렸다.

- 나무에서 살게 해 주면 안 돼?

큰일날 소리였다.

우리가 얼마나 그 다람쥐를 좋아했는데!
사랑스러운 다람쥐에게 다람쥐집 밖은 위험했다.

우리의 기준에서는.


그렇게 몇 달인가, 몇 주인가를 지낸 어느 날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모두 밖에 다녀오니,

다람쥐 집의 문이 열려있고, 안에는 텅 비어 있었다.
놀란 우리들은 우르르 어떻게 된 일인가 살펴보았지만,

이미 다람쥐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언니들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 분명히 하영이가 열어준 거야!

화가 난 우리들은 하영이를 데려다가 추궁을 했지만, 그녀는 무서운 세자매파의 협박에 겁에 질린 채, 진실을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끝까지 자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분명 잡아뗀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다람쥐가 혼자 문이라도 열고 도망갔단 말인가!

서너살 꼬마를 더이상 몰아붙일 수가 없어, 거기서 멈췄지만 그 억울함과 분노는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지금도 이렇게 기억나는 걸 보면 말이다. 아. 물론 지금은 행복한 자연을 찾아 떠난 다람쥐의 행복을 빌지만.



다람쥐 탈주 사건 이후.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작은언니는 또 한번 도전을 했다. 학교에서 오는 길에 병아리를 한 마리 사온 것이다.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언니는, 클 때까지도 이렇게 덥썩덥썩 어디선가 동물들을 한마리씩 데려오곤 했다.)


이번에는 병아리를 저쪽 안마당 사랑방이 있는 곳 옆에 놓고 키웠다. 병아리가 커가면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안쪽 깊이에 닭장을 놓은 것이다. 우리는 다시 그 앞에 쪼그려 앉기 시작했다. 지금은 조류공포증이 있는 내가, 그때는 그런 것도 없이 잘만 가서 병아리를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꼬박꼬박 모이를 주고 돌봐주신 덕분에, 병아리는 쑥쑥 자라났다.

어느 날인가 제법 중닭이 된 병아리.

아니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닌 병아리가 보였고, 난 너무 무서워서 그 때부터 병아리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중닭'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병아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작은언니는 역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그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덧 닭은 늠름한 종닭으로 컸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하는 바로 그 순서.
할머니의 한 마디.


- 은지야. 이제 복날이 다가오니 잡아 먹자. 닭이 너무 늙으면 키우지도 못해.

당연히 언니는 난리가 났다.
절대 안된다고.
병아리 잡으면 할머니 안 볼 거라고.
(아직도 언니에겐 병아리. 이미 무시무시한 종닭이었는데)

그리고 어느 날. 언니가 학교에 간 사이.
거사는 치뤄졌다.
시장에 있는, 닭집에 가서 바로 해결(?)하고 오신 것이다.
시장에 있던 닭집의 광경을 지금도 나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생닭들이 일렬로 쭉 걸려있는 곳이었다. 난 엄마랑 그곳에 갈 때마다 생닭들을 신기하게 유심히 바라보곤 했었다. 우리의 병아리도 그곳에서 매달려있던 생닭으로 변해버린 것이니, 그것을 받아들일 어린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집 밥상에,

가마솥에 푹 고아낸 백숙이 올려졌던 날.
작은 언니는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온종일 울며 마당 가운데

나무의 쭉 뻗어나간 가지 위에 앉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 은지야. 니 닭은 다른사람한테 주고, 우리가 다른 닭 잡아온 거야.


라고 달래셨지만
언니는 내려오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 난 다시는 닭을 먹지 않을 거야


엄숙한 선서가 그날 밤 공표되었다.

그런데
언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백숙은 정말 맛있었다.
우리집 그 커다란 가마솥에 푹 고았으니
맛이 없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엄마 말씀에 의하면
그 뒤로 언니는 곧 백숙을 아주 잘 먹었다고 한다.


다행인 일이다.
트라우마는 맛있는 백숙으로 순식간에 치료가 되었으니 말이다. 역시 맛있는 음식은 상처 치료에 특효약이다.


그렇게

다람쥐의 쳇바퀴 돌던 모습과

종닭의 꼬꼬거리던 울음소리는

슬픔과 아쉬움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내 눈에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이미 꽃은 저버린

진보라빛 자목련 꽃나무에 올라

가지 사이에 기대어 울던

언니의 눈물이 보인다.


병아리를 안고 있는 작은언니



* 이 이야기는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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