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옥집에 시집온 여자 이야기

24. 엄마 이야기

by 밤호수

여자의 집은 홍성이었다.
정비공장집
일곱 남매의 맏이였고,
어릴 적부터 야무지고 똑똑하기로
근방에서 소문난 처녀였다.
여자는 꿈이 많았고,
시를 썼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시를 쓸 때 여자의 필명은 ‘설아'였다.
깨끗하고 고고한 이상을 꿈꾼
여자였다.
그리고
여자는 그런 사랑을 꿈꾸었다.




그 남자에게서는
방황의 소식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바람결에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또 어딘가에서도.
바람 따라 떠도는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는
남자의 마음을 느꼈다.
여자는 남자의 방황을 멈추고 싶었고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에게 보낸 편지는
돌고 돌아
그를 그녀에게 데려왔다.

그렇게.
72년 4월 어느 날.
홍주의 한 초등학교 강당에서는
결혼식이 열렸다.
양쪽 고장의 사람들이 많이도 모였다.
어느 시골 사람들은
계란 두 줄을 가져왔고,
누군가는
쌀가마니를 가져왔다.
축의금을 세어준다고
돈을 들고간
여자의 동료선생들은
그날 밤 그 돈으로 술이 진탕이 되도록 마셨다.

온양에서 신혼여행을 마치고
이튿날 여자는 한옥집으로 갔다.
친정아버지도,
학교 교장선생님도,
교회 학교 교장 선생님도
함께 갔다.


앞뒤로 바람이 시원하던 대청마루에서
여자는 폐백을 드렸다.
색종이를 오려 연지곤지를 붙였다.

4월의 한옥집은
아름다웠다.
하얗고 빨간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자목련과 흰 목련이 소담스러웠다.
이웃들이 씨를 얻으러 오곤 했던,
봄부터 붉은 단풍나무는
유독 그 해 봄 붉게 타올랐다.
한옥집 정원의
휘돌아치는 아름드리 모습에
여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람드는 한옥의 아름다움처럼
그녀의 결혼생활도 그리 아름답길 꿈꿨다.



그렇게 여자는 한옥집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는
아침 저녁으로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문안을 드렸다.
하루는 저녁인사로
‘아버지 어머니 편히 쉬세요'
라고 했다가
집에 계셨던 고모님께서 살짝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은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라 하셨다.

큰 한옥살이에서
빈틈없으신 시어머니는 어려웠고

자애롭고 산 같으시던
시아버지는 얼마 후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일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한옥집 살림은 컸다.
물도 씻어먹는다고 소문난,
깔짬부인이라 불리며
음식솜씨도 대단하셨던 시어머니에게
여자는 부족한 며느리였을 게다.
게다가 여자는 계속 학교 선생 노릇을 했다.

직장생활에
시부모 봉양에
만삭이 된 여자는
매일매일이 힘겨웠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악착같이 해나갔다.
때로는 수업이 열 시간씩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하고
밤 10시까지 야간자습 감독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다.

직장을 그만두라는
시누이의 혼쭐도 들었다.

하루는 잠옷을 입고 있다
시어머니가
밤늦게 교회에서 오시는 소리를 들었다.
잠옷이 부끄러워
방안에서 인사를 했다.
그일로 어머니께 생전 처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여자의 눈물은 밤새 멈추지 않았다.
부은 눈으로 학교를 가는데도
흐느낌이 멈추지를 않았다.

임신 중에 집안 추도식이 있어
다양한 음식 준비를 하면
그 음식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제사 음식은 손 대는 것 아니다.’

단호한 어머님의 말씀에
여자는 감히 먹을 생각도 못했다.
친정어머니가 보고싶었다.

둘째 딸이 장이 꼬여 호되게 아팠을 때
여자는 사표를 냈다.
하루라도 더 아기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시간을 두고 생각하라고 하셨고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셨다.

기다려 주셨기에

여자는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흘렀다.

세 딸들이 태어났고,
여자는 더욱 악착같아졌다.
아들을 못 낳는다는
죄책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세 딸들은
할머니와 아빠의 사랑을 받았다.
여자도 한옥살이에
요령이 생겨갔다.
시어머니 몰래 세탁기를 사놨더니
‘손목아지가 부러져도 저기에 빤 옷은 못 입는다.’
하셨다.
하지만 여자는 몰래몰래
나중에는 어머니도 인정하시도록
세탁기를 쓰는 요령도 생겼다.

여자는 점점 강해졌고,
한옥집과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갔다.
매일매일 세 아이를 키우며
기동성있게 움직여야 했던 그녀는
공주 시내 최초로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여자가 되었다.
수업을 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나와
아이들 소풍을 갔다 오기도 했다.

아침이면
원피스를 휘날리며
모자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여자의 모습은
시내에서 명물이 되었다.
때로는 세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모습도
화제가 되었다.

그녀 덕에
다른 여자들도 오토바이를 사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가게에서
추석에 갈비를 보내왔다.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작은아이가 말했다.
‘엄마, 언니가 없어'
놀란 여자가 멈추니
뒤에 큰 아이가 떨어져 있었다.
부산한 큰아이가
이리저리 정신놓고 있다가
폴쩍 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더욱 더
이를 악물었고,
강해졌다.

흩날리던 안개꽃같던,
눈속의 소녀를 필명으로 쓰던,
사랑을 꿈꾸던 여자는
‘남편 없는 인왕산 호랭이도 잘만 산다'를
맘속에 품고 사는
한옥집 안주인이자
강인한 세 딸의 엄마가 되어 갔다.


*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