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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흩날리던 멧돼지 농장에서

25. 멧돼지집 이야기

by 밤호수

공주에서 대전가는 길목.
청벽가는 금강변에 있던 초막집.


그곳에
‘멧돼지집'이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농장이고
마당한 곁에 대추가 익어가고
대추나무엔 검은 염소가 음메 울던 그 곳.
다람쥐같이 줄무늬가 있는 어린 멧돼지부터

까맣게 큰 멧돼지까지 뛰노는,
멧돼지 농장이 있던 집.

나는 지금도 언제나 그곳이 그립다.
아빠와 함께 사업을 하시던 친구분이 운영하시던 곳이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멧돼지 농장에서 조그맣게 시작하시다가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원두막도 짓고 점점 확장되어 간 식당. 기름기 없고 느끼하지 않은 멧돼지고기는 시작하자마자 금세 인기를 끌어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우리 딸 셋의 어릴 적 마법의 주문은
‘멧돼지집 가자!’ 였다.
슬플 때도,

아플 때도,

배고플 때도,

다쳤을 때도,

마법의 주문.


- 멧돼지집 가자!


꼬맹이 우리 딸 셋이 10인분을 거뜬히 해치웠다는 전설이 오랫도록 회자되었던 그 식당.

얼마나 맛있었던지, 숨도 안쉬고 먹던 기억들이 지금도 있다. 양념이 잘 밴 고기를 쌈에 올려 파채를 얹고 쌈장에 찍어먹던 그 맛! 그러니 주변 분들이 ‘딸들 고기 먹이려면 돈 많이 벌어야겄어' 라고들 하셨다는게 이해가 간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나였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딸 셋 중에 먹는 거라면 내가 으뜸이니까. 그렇게 고기를 좋아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양도 그만큼 안 되지만, 그 맛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맛있던 고기는 아마 인생 통틀어서 ‘은성멧돼지집'이 최고였을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시던 아빠 친구분 아저씨는 덩치도 크고 좋은 듬직한 분이셨다. 그 때문에 황당한 사건에 얽힌 적이 있었는데, 엄마아빠에게 두고두고 들어온 정말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멧돼지집에서 시내로 오려면 십리쯤 걸린다.
그날 따라 아저씨는, 밤 열두시가 넘어 가게를 마무리하고
들판길을 걸어 집으로 오고 계셨다. 시내로 오는 길에는 검문소가 있었는데, 마침 며칠 전에 강도사건이 근처에서 있었단다. 예의주시하고 있던 검문소 근무요원에게 덩치 큰 아저씨는 미심쩍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집까지 가신 아저씨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가족들이 자느라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할수 없이 가게에서 자기 위해 다시 길을 돌아 검문소 앞을 지나 가게로 가고 있었단다.


- 아까도 수상했는데, 새벽 한시가 다 되어 이 사람 없는 들판길을 다시 어슬렁거리다니! 이건 분명 무슨 나쁜 짓 하나를 저지르고 도망가는 ‘강도'가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검문소에서 보초를 서던 요원들의 확신이었을 것이다. 경찰 한 명과 공익요원 한명이 아저씨에게로 다가가서 경찰은 말을 걸고 그 틈을 타 공익요원이 뒤로 가서

- 몽둥이로 퍽!!!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도립병원에 아저씨가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무척 심각한 상태였고, 실명될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청천벽력같은 소리마저 들었다. 아저씨를 몽둥이로 내려친 사람은 경찰도 아니고,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던 어린 대학생이었다. 그 어린 요원은 또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겠는가! 큰 공을 세우는 줄 알았더니, 선량한 시민을 반불구로 만들어버릴지 모르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서울 병원까지 왔다갔다 하며 좋은 치료를 받으신 끝에, 아저씨는 멀쩡하게 퇴원하셨다. 그렇게 어이없는 일들이 있던 시대였다.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도 있다.
그 어느 날.
학교 선생님들과 멧돼지집으로 회식을 가신 엄마는, 적당히 술도 마셨고, 기분도 좋고, 회식이 끝난 후 선생님들과 밖으로 나오셔서 택시를 잡고 있었다. 대전과 공주의 중간즈음 길이라 택시가 많이 다닐 리 없는 곳이었다. 그 때 차 한 대가 멀리서 미끄러져왔고, 선생님들 앞에 섰다.


제법 취한 엄마는 차를 ‘땅땅' 두드리며


- 아저씨, 태워주세요~

라고 자못 애교까지~!

그 순간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잔소리 말고 얼른 타!


대전에서 오시던 아빠였다.

머쓱해진 다른 선생님들이 뒤로 물러서고, 엄마는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단다.
다음 날 아침, 선생님들은 ‘김선생 다리몽둥이 부러진거 아니냐'며 걱정하셨고,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 엄마의 등장에 모두 ‘휴우~’ 가슴을 쓸어 내렸단다. 다행히도 아빠는 엄마의 사회 생활에 너그러운 분이셨기에!




멧돼지집의 뒤에는 앞서 말한 멧돼지 농장이 작게 있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 그 뒷산을 산책하곤 했는데, 꽃이 피는 봄이면 저녁무렵의 농장 앞 산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엄마는 그 길을 걸으며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시고, 씀바귀 등 나물도 뜯고 하셨다. 그때 엄마가 가르쳐주신 오래된 팝송 ‘From this valley, they say you’re going~’하던 멜로디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 때는 ‘프럼디스벨~ 리데세~ 유아고잉' 이렇게 들렸던 노래.

멧돼지집에서는 고기만 쓸 뿐, 돼지족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족을 가져가게 하셨는데, 엄마가 곧잘 얻어오셨다.


엄마는 자칭 타칭 ‘족의 1인자'셨다고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족의 1인자'라니!!! 너무 재밌는 표현이다.


집에서 추도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엄마는 멧돼지집에서 두 마리 분의 돼지족, 그러니까 족 8개를 얻어와서 구이를 만드셨다.
추도식마다 갈비를 구우시던 할머니는 처음에는 ‘족은 안된다'고 하셨지만 몇 번 드시고는 괜찮다고 허락을 하셨단다. 지금처럼 정향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간장을 굽고 파마늘을 듬뿍 뿌려 석쇠에 구운 족구이는 정말 맛있었다. 삶아서 물을 버리고, 다시 건고추 생강 커피를 넣고 삶아 냄새 잡고, 간장 양념해서 석쇠에 구우면 그 꼬들거리는 맛과 피부의 느낌은 끝내준다. 그게 돼지족인지, 소족인지, 알 순 없었지만 어쨌든 먹성 좋던 우리들과 추도식에 온 친척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지금도 은성멧돼지 집이 있다.
십여년 전에도 남편과 간 적이 있었지만,
그 때 그 맛도,
그 때 그 분위기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 나름대로

다른 주인의 다른 분위기로
다른 맛이 있었지만
어떻게 그 맛과 그 분위기를 다시 살리겠는가.


아카시아 꽃이 흩날리던 농장과,
사람이 바글거리고,

석쇠에 구운 멧돼지 냄새가 가득하던,
깔깔대던 세 소녀의 웃음소리와
젊고 건장한 아빠들의 이야깃소리가 들리던
그 때 그 분위기를
어떻게 돌릴까.
그 맛을 어떻게 소환할까.
내 유년의 멧돼지집을.



*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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