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 이야기 하나
제가 퀸 학원을 나올 때는 제 앞날이 곧게 뻗은 길인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저 끝까지 한눈에 다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길모퉁이에 와 있는 거여요. 모퉁이를 돌아가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틀림없이 제일 좋은 것이 절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뭐여요. 거기에는 거기대로 신나게 좋은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계몽사 ‘이석봉' 번역 ‘)
내 나이 스물 셋.
시험 준비를 위해 1년간 도서관 불빛을 날마다 밝히던 시절이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인해 힘들고 쉽지 않았던 시간이지만, 반면 23년 간 한번도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의 밤시간을 주로 문학공부에 투자했는데, 학생들이 많이 빠져나간 고요한 열람실의 밤은 작가를 만나기에 완벽한 시간이었다. 재미없는 작품으로만 여겼던 교과서의 작품들, 작가들이 나에게 튀어나와 말을 거는 것 같았고, 혼자서 고등학교 자습서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시험을 위한 공부였지만 그 언제보다 진심으로 작품을 대했다. 지금도 그 때의 감성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그 때 시험 준비를 위해 만났던 스터디 친구들과 정보공유를 위해 만든 온라인 카페의 이름이 ‘길모퉁이'였다.
길모퉁이.
어린 시절부터
‘앤'을 통해
그리고 ‘앤’과 함께
내 인생의 다음 단계가 희미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대학에 떨어졌을 때.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세상이 온통 흐려 보였을 때.
그리고 또 시험 준비를 위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있었던 그 때.
미국에 와서 혼자 육아에 시달리며 나의 삶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던 그 때.
나는 매번 앤과 같이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졸업식에는 매듀도 매릴러도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단상의 학생 하나에게만 못박혀 있었습니다. 연초록색 옷을 입고, 불그레하게 볼이 상기되고, 별처럼 눈이 반짝거리는 키가 큰 소녀 - 가장 뛰어난 논문을 읽고 있는 그 앤을 보고, 사람들은 저 학생이 애이버리의 수상자라고 서로 속삭였습니다.
앤은 퀸 학원에서 1등으로 졸업을 했다 .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껏 청춘을 즐기며 ‘에이번리 장학금'까지 받고 졸업한 앤은 ‘교사'가 되겠다는 원래의 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다. 당시로는 꿈같이만 여겨지던 레드먼드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는 온통 장밋빛처럼 여겨졌고 끝도 없이 더 큰 목표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이 지난 뒤, 매듀는 그가 갈던 밭과 과수원을 지나서 영원한 안식처로 옮겨졌습니다. 애본리는 다시 평온해 졌습니다. 그린 게이블스도 이전과 같았습니다. 다만, 낯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일이 앤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맞닥뜨린 매튜 아저씨의 죽음.
이 일은 앞만 보고 달려오던 앤을 잠시 멈춰서게 했고 앤은 주변을 둘러 보게 되었다. 사랑하는 매튜 아저씨가 죽었다. 그리고 눈이 좋지 않은 마리라는 혼자서 그린 게이블즈를 관리할 수가 없다. 마리라는 그린게이블즈를 팔려 한다. 그리고 앤은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마리라. 그린 게이블즈…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님을 앤은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조금도 희생이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이 소중한 그린 게이블즈를 지키자는 얘기에요.
아, 이것저것 많이 계획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저, 좋은 선생이 되려고 벼르고 있어요. 제가 퀴인 학원을 나올 때는 제 앞날이 곧게 뻗은 길인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저 끝까지 한눈에 다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길모퉁이에 와 있는 거여요. 모퉁이를 돌아가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틀림없이 제일 좋은 것이 절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뭐여요. 거기에는 거기대로 신나게 좋은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을 포기하고 교편을 잡기로 결정한 앤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애본리 학교의 교사로 결정된 길버트가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앤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이렇게 앤은 즐거운 오래된, 그러나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던 인연을 이어가며 길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은 자신의 삶에 충실히 즐기고 행복하게 지낸 앤은 몇 년 있지 않아 또 한 번. 앤은 길모퉁이를 돌게 된다. 린드아주머니의 남편의 죽음과 함께, 마리라는 린드 아주머니와 함께 그린 게이블즈에서 살기로 하고 앤은 미뤄왔던 대학 진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날 밤, 앤은 자기 방의 창가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이 되어 가슴에 꽉 차올랐습니다. 마침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길모퉁이를 돌아 나왔습니다. 길모퉁이를 돌면 대학이 무지개 같은 희망에 둘러싸여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아 나온 순간, 2년 동안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기쁨이었던 조그마한 의무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
수많은 길모퉁이를 돌아왔다.
카페 이름을 ‘길모퉁이'로 했던,
불확실한 미래에 아파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 길을 돌면 반드시 좋은 미래가 있을 거라고 자위하며, 설레고 한편 두려운 마음으로 모퉁이 이쪽에 서 있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앤이 말한 것처럼 신나고 좋은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인생의 모퉁이 다음이 매번 신날 수만은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지금은
‘모퉁이를 돌아버린 나'가
‘돌기 전의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내일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비록 돌기 전이 더 좋았을 지언정, 더 화려했을 지언정, 나는 모퉁이를 돌며 조금은 성숙했고 성장했을 것이므로. 그리고 더이상 ‘어제의 나'가 아님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그게 바로 나이가 들어가는 내가 다시 만나는
‘The bend in the road’이다.
그리고 나와 내 아이들이 길모퉁이 앞에 서 있을 때마다, 혹은 이미 돌아나와 망설일 때마다 경험하길 원하는 가치이다. 나와, 내 아이들과, 우리 모두의 모퉁이 저쪽에서. 혹은 돌아나온 이쪽에서 어제의 나보다 조금은 성숙해져 있고 겸허해져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 블로그와 같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