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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제민천에 물소리도 맑구나

29. 제민천 이야기

by 밤호수

얼마 전, 공주를 다녀온 후배의 문자를 받았다. 공주 제민천 근처의 한옥펜션에서 묵었는데 그쪽 근처가 참 좋았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한옥일기'배경이 바로 그곳이라 하자 후배는 깜짝 놀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듣는 공주 그것도 제민천 소식에 반가운 마음 감출길 없었으나, 한편 그곳은 내가 아는 그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쓸쓸해지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제민천은 청계천 거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먹거리 볼거리 많은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학교에서 오는 길.

전에도 언급했듯이, 어린 우리에게 그곳은 꽤나 먼 길이었다. 그래도 씩씩하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책가방 메고 열심히 달렸던 길. 자전거 사고도 당했던 길. 오다보면 ‘마리아 수예점'도 있고, 장날엔 장구경도 하던 길. 그 길이 제민천 옆길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질퍽거려 힘들고, 눈이 오는 날엔 떨어지는 눈을 먹으며 달려가던 길.


나의 초등학교 교가에는 ‘흐르는 제민천엔 물소리도 맑구나'라는 가사가 들어있었으니, 제민천은 공주의 상징이자 우리 학교의 상징이기도 했다. 교문을 나와 걸으면 플라타너스 나무가 끝도 없이 냇가 옆으로 심어져 있었다. 그 덕에 그토록 많은 ‘송충이'가 있었던 거라고 언니는 말했다. 하긴,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송충이를 빼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수많은 송충이를 보았고, 잡았고, 진저리를 쳤다. 때로는 플라타너스 나무들 사이로 삐이라를 발견하기도 했다. 대단한 보물인양, 삐이라를 집어 선생님에게 가지고 갔다. 플라타너스 길만 지나도 휴우 했다. 이제 다리를 건너 주욱 가면 집 근처까지는 갈 수 있으니까. 말 그대로 ‘산넘고 물건너’다니는 학교 길이었다. 어린 다리로 족히 3~40분은 걸었던 듯 한데, 지금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궁금해진다.


언니들과 함께 제민천 옆으로 죽 늘어선 둑 위로 걸어오는 기분은 짜릿했다. 어른들이 보면 위험하다고 반드시 한마디씩 하셨지만, 기어코 그 좁은 둑 위로 걸어올라가고야 말았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제민천에서 소금쟁이를 잡기도 했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제민천에서 수영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빠는 종종 말씀하셨다.


우리 때는 제민천에서 목욕하고 수영하고 다 했어!


그 말씀은 사실이었다.


지금의 제민천은 내가 아는 최고의 오래된 시간인, 나의 아버지 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장난꾸러기 우리 아버지의 어린시절에도, 제민천은 늘 친구와 같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여름날의 지리함을 달랬다. 겨울이 되어 개울물이 얼면 썰매를 탔다.

잠자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동네 여인들은 저녁이 되면 제민천에 나와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함께 그때 ‘덴찌'라고했던 불빛을 만들어 몰래 숨어 비치며 장난을 치다 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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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소년이 커서 장가를 간 후, 새색시 엄마에게도 제민천은 삶의 한 부분이었다. 공주 끝에서부터 졸졸졸 흘러 저쪽 금강변까지 이어지는 제민천은 그렇듯 공주에 살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 속에 늘 함께 있었으므로 공주로 영입된 그 누구든 제민천과 삶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학교에서 회식이라도 있는 날엔, 술 한두잔씩 걸치는 걸 좋아하셨던 엄마는 술냄새를 풍기고 집에 가는 것이 부끄러워, 제민천 다리를 그렇게 빙빙 돌다 들어가셨단다. 그렇게 술냄새를 완전히 없앴다고 자신만만해서 들어가 할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를 하고 방으로 가셨는데, 나중에 할머니께서 고모에게


얘, 새애기는 술도 잘 마시나봐. 집에 왔는데 술냄새가 폴폴 나.


하시더란다. 결국 제민천다리를 그렇게 돌았던 엄마의 노력은 혼자만의 안심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대통다리 근처에 있던 공주 유일의 아이스크림집은 모두의 선망의 장소였는데, 엄마가 아기를 가졌을 때 얼마나 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지, 학생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얼른 두 개를 사와 드셨다 한다. 왠지 아이스크림을 먹는게 아이같고 부끄러워 할머니께 말씀도 못드리고 그것도 몰래 숨어서. 어르신을 모시고 살면 아무래도 매사에 행동이 조심스러우니 그러셨을 테지만 지금 우리들로선 상상도 안가는 일이다. 아이스크림 먹는 게 뭐가 어때서!


제민천에 얽힌 엄마의 사연은 비단 그 뿐이 아니었다.

이는 내 운명에도 연관된 중요한 일인데, 언니들 둘이 태어나고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엄마는 세 번째 임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엄마가 자전거를 타고 제민천 대통다리를 지나시다 그만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다른 선생님의 자전거를 피하느라 핸들을 꺾다 자전거를 탄 채 다리 밑으로 떨어지신 것이다. 그리고 당연스레 유산을 하게 되었다. 아기를 잃은 엄마의 마음에 상심이 얼마나 컸으랴마는, 사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일도 없었겠지. 아빠 말씀에 의하면 그 아이가 ‘남자아이'가 틀림없었다고 하니. 딸 둘에 아들 하나로 넘치고도 족했을 부모님이 또 아이를 가졌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자고로 운명은 이와 같이 흘러 나를 이 세상에 내놓았고, 그 과거의 사연을 이리 적고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후배가 보내준 사진의 제민천은 조금은 변하긴 하였으나 한참을 들여다보니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던 과거 냇물의 정취는 그대로였다. ‘대통교'라고 쓰여진 대통다리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근처에 있던 ‘무궁화목욕탕'은 ‘무궁화회관'으로 바뀌어 고깃집이 되어 그대로 있었다. 그 회관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탄성을 지르며 ‘목욕탕!’을 외쳤다. 엄마의 오토바이에 실려 매 주말마다 다니던 목욕탕까지, 제민천 대통다리 근처의 모습은 나를 그리움으로 끌고 들어갔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한 것은.

그 다리를 오가는 우리가 그곳에 없다는 것.

그곳에 새로 생긴 음식점들과 단장된 다리 옆 길과 펜션들사라진 플라타너스 나무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함없이 대통다리 밑을 흐르고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물들.

그리고

여전히 제민천에서 매일매일 이어질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들.


비록 더 이상 우리가족의 이야기는

대통다리와 제민천을 끼고 이어지지 않지만

흘러가는 냇물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가던

장난꾸러기 아빠의 이야기를.

그곳에서 목욕하고 빨래하시던

할머니와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리에서 떨어져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를.

그리고 송충이를 밟고 소금쟁이를 잡으며

플라타너스 나무와 제민천 사이를 뛰어가던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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