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독대
지금도 나는 TV에서 장독대나 장독 뚜껑을 여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다. 마음이 아련해지고, 항아리를 손으로 쓸어보고 싶기도 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질거리는 장독대 뚜껑을 열고 까치발을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세계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나무구멍처럼. 그렇게 장독대 안으로 통과하여 한옥집의 세계로. 햇살 가득하던 한옥집 뒤편. 크고 작은 장독대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그 시절로.
장독대 안에는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간장. 된장. 고추장 등 갖가지 장이 있었다. 햇빛에 장을 쪼여야 골가지가 안 낀다고 각별히 날 좋은 날이면 햇볕을 쬐어주며 신주단지처럼 보관하시던 집안 음식의 기본 장들. 항아리 안에 가득 담긴 각종 장들. (훗날 우리가 아파트로 간 뒤 엄마는 할머님이 예쁘고 작은 항아리에 건네 주신 장들을 베란다에 보관하곤 하셨지만, 어떻게 보관을 해도 결국엔 골가지가 끼고 말았다 하신다. 항아리의 장들은 아파트 베란다보다는 한옥집 뒷편 널찍한 장독대에서 평화롭게 지낼 때 그 맛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집 장독대는 콘크리트로 만든 약 3~5미터의 판석 위에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무릎 높이보다도 위였기에 나는 그곳에 올라서면 키가 커지는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 내 키보다도 훌쩍 큰 항아리 뒤는 숨바꼭질 장소로 제격이기도 했다. 우리는 장독대 사이사이를 누비며 놀았다. 장독 깨질라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잔소리는 뒷전이었다.
초여름이 되면, 장독대 옆에 맨 먼저 ‘이별란'이 피었다. 이별란. 이 꽃은 잎이 먼저 피는게 아니라 꽃이 먼저 피고 지면, 이파리가 나와 이별란이라고 한단다. 꽃과 잎이 서로 이별을 한다고 생각을 했나보다. 이 슬픈 이름의 꽃이 지면, 마가렛꽃이 피었다.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엄마는 ‘빨간머리 앤'의 ‘숲속의 오솔길'보다도 더 아름다울 거라 말씀하곤 하셨다.
그리고 그 옆엔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었다. 키가 큰 앵두나무는 여름이 되면 싱그러운 앵두가 가득 열렸는데, 이미 앵두가 제대로 익어가기도 전부터 담 건너 ‘공주사회관. 공주유치원' 아이들이 탐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도 모두 다녔던 공주사회관과 공주유치원. 낮은 담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어 저쪽 사회관에서 그네를 타면 우리집 대청마루에서 누워있는 것도 다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니, 이쪽 담 안에서 익어가고 있는 앵두가 얼마나 어린 아이들의 침샘을 자극했겠는가. 아직 채 익지도 않은 앵두가 사회관 아이들의 고사리입으로 들어가고, 나무를 향해 뛰어오르다가 아이들이 다치기도 하고,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기도 하는 등 여름의 주인공은 늘 앵두였다. 끝까지 잘 보호되어 제대로 익은 빨간 앵두는 우리 자매들의 입속으로 온전히 들어왔다. 그 달콤한 첫 앵두의 맛이라니!
앵두나무 옆에는 작은 광이 있었다. 이 광에는 제철생물로 담근 각종 젓갈과 게장이 보관되었다. 한옥집에는 철따라 해산물을 가득 싣고 오는 식료품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조개를 잔뜩 가져온 때에는 항아리를 내밀면, 조개젓을 담가주고 가고, 조기를 가져온 날이면 조기젓을 담가놓고 갔다. 꼴뚜기젓이 많은 때에는 복렬언니가 젓갈을 다시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넣고 꼬득꼬득하게 무치면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오징어젓과 새우젓도 단골 젓갈이었다.
초겨울이면 노성민물게장이 최고였다. 한옥집에서는 200마리가 넘는 민물게로 게장을 담갔다.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간장으로 담근 게장의 맛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디스토마가 걸린다고 우리들은 못먹게 했으니 얼마나 옆에서 침을 흘렸는지!
앵두나무 아래에는 땅 속에 묻힌 항아리들이 있었다. 그곳은 또 김치를 위한 특별한 저장고였다. 한옥집의 김장은 유명했는데, 김장철이 되면 대청마루에 배추를 잔뜩 썰어놓고, 다음날 새벽부터 박씨 아줌마와 산지기 아줌마가 와서 거들기 시작하면 김장이 시작되었다. 배추김치, 보쌈김치, 백김치, 총각김치, 중간무 김치, 파김치, 동치미김치 등 여덟가지가 넘는 김장들이 그득그득 항아리에 담겨지고, 위에 대나무 이파리로 덮어 보관하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김장날이 좋았다. 옆에서 ‘매워매워'를 연신 외치면서도 갖가지 김치들을 끝도 없이 먹어댔다. 그날은 한옥집의 축제날이었다.
그렇게 대나무잎으로 덮어 땅속에 묻힌 항아리에 보관된 김치는, 고모들에게, 작은 아빠에게 골고루 돌아갔고, 부모님 친구분들의 침샘도 자극했다.
때때로 부모님과 친구들이 함께 늦게까지 먹고 마시던 밤에는 다들 ‘한옥집의 동치미와 민물게장'이야기를 하며 침을 삼켰고, 아빠는 몰래 친구들과 함께 와서 할머니와 우리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 항아리를 열고 김치와 광 속의 게장을 잔뜩 들고 다시 친구네로 가셨단다. 그렇게 한밤중에 다시 새밥을 해서 친구들과 함께 드신 김장김치와 게장은 그 맛이 어땠을지!
참. 땅에 묻힌 김치 항아리 옆에는 아주 작은 움막도 있었다. 움막 앞을 지푸라기로 막아놓았지만, 그걸 빼고 손을 넣으면 겨울을 위해 저장해 둔 무와 배추가 가득했다. 겨울에 하나씩 꺼내와서 그걸로 무국도 끓여먹고, 했단다.
겨울이 다가오면 광 속은 평소보다 더 가득해졌다. 설탕이 20키로씩 들여졌고, 땅콩 과자며 튀밥이며 할머니의 솜씨좋은 먹거리가 들어찼다. 갱엿과 전과가 할머니 벽장 속에 자리했고, 찹쌀을 쪄 앙꼬를 넣은 찹쌀떡은 부엌문 옆에 매달려 적당히 얼면 겨울밤에 가져다 구워 먹었다. 먹을 게 수두룩한 따뜻한 겨울밤이었다.
장독대. 앵두나무. 그리고 젓갈을 보관한 광과, 땅에 묻은 김치 항아리, 무 배추를 위한 움막. 겨울 간식을 보관하는 벽장까지 한옥집의 음식 저장방식은 다양하고도 풍성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하나도 저장고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맛은 냉장고나, 오늘날 김치냉장고가 따라갈 수가 없는 맛이었다. 자연이 철따라 저절로 제공하는 햇살과, 바람과, 추위는 음식들을 각기 최고의 제 맛을 내도록 해주었고,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할머니의 작은 발이 총총거리며 온종일 이 저장고들 사이를 바삐 움직이셨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한옥집을 떠난 후.
곧 할머니도 한옥집을 떠나 작은아빠와 함께 살게 되셨는데, 그 때 이삿짐을 옮기며 장독대도 다 처분을 하셨다. 할머니가 시집을 오면서부터 사용하신 장독대. 식구들의 입맛 하나하나까지 신경써 늘 정갈한 음식을 진두지휘하시던 할머니의 솜씨. 그 기본이자 비결이었던 소중한 장이 1년 365일 풍성히 담겨있던 장독대도 이제는 처분을 해야 한 것이다. 작은 항아리들은 모두 주변에 나누어주고, 골동품 상인이 와서 가져가기도 했지만, 어른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항아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줄 수도, 가져갈 수도 없자 처치곤란이 된 항아리. 일하러 온 아저씨에게 처분해 달라고 하니 깨서 내놓으면 가져가겠다 했단다.
할 수 없이 할머니께서 망치를 들고, 장독대를 직접 깨뜨리셨다.
이 이야기를 적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한옥집에 시집와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오신 할머니의 마음. 평생을 커다란 한옥집을 종종거리시며 식구들 먹일 것을 생각하고 큰 집안 살림을 꾸려가시는 것만 생각해오신 할머니의 삶. 어쩌면 그 항아리들 안에는 할머니의 정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한옥집에 대한 애정 모두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그 항아리를 자신의 손으로 깨뜨리셨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당시 너무 어렸던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잘 몰랐지만. 이렇게 먼 세월이 흐른 지금은 깊이깊이 생각한다.
할머니가 지키고자 했던 그 무엇과
그것을 지켜드리지 못했던 부모님의 마음.
그리고 깨진 항아리의 슬픔을.
내가 비록 지키진 못했지만,
나는 이 글로 지켜내고 싶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할머니가 지켜내고자 하신 것들을. 이 글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다. 깨어진 장독대와, 따스한 햇살을 쪼여 찰기가 자르르 돌던 할머니의 장들의 생명을. 겨우내 먹을 것이 가득했던 따스한 한옥집의 겨울. 그것들을 준비하시며 행복해하셨을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우리들의 잃어버린 그 집을.
* 이 글은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