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향하여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다만 책과 나의 이야기일 뿐.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내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대나
어린 시절 학교 합창단에서 연습곡으로 늘 부르던 이 노래.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이 곡을 수도 없이 불렀는데, 그때마다 나는 ‘산 너머 남촌'을 꿈꾸곤 했다. 남쪽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저 산 너머 남촌에서는 봄바람도 불어 오고, 진달래 향기도, 보리 내음새도, 고향의 향기도 함께 불어올 것 같았다. 고향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마음의 고향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딘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따뜻한 남쪽나라 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남쪽 바닷가 동네에 가서 몇 년을 지내게 되었다.
갓난쟁이 아들을 키우면서 바닷가 새댁으로 그렇게 살았다. 삼천포 항 근처에서 지낸 시간 동안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침저녁으로 바닷가를 거닐었고, 유모차를 밀며 파도소리를 들었다. 주말이면 남해의 섬 곳곳을 다니기도 하고, 함께 계시던 아빠와 함께 정처없이 남해를 다니다 근처 정자에 앉아 마을 분들에게 수박 한쪽을 얻어먹기도 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던 남도의 사투리가 두어달쯤 지나자 익숙해지고 정겨워졌다. 길가는 아주머니 할머니들 아무나가 ‘새댁아~’하면서 말을 걸으면 난 그들 모두의 딸이 되고 며느리가 되곤 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부담스럽던 그들의 언어와 생활습관이 어느새 나의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남해 곳곳과 친해지던 무렵 다시 길을 떠났고, 지금 나는 미국에 온 지 십년이 넘어간다.
고향에서 멀어진 나는.
다시.
따뜻한 ‘산 너머 남촌'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만난 이 책.
통영, 아빠의 바다.
나는 그림을 모른다.
무엇이 좋은 그림인지, 무엇이 비싼 그림인지, 도통 모른다. 그런데 종종 그림이 글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그림을 느끼게 된다. 그리움을 느끼고 그림의 온도를 느끼고 색채를 느낀다. 이 책이 그러하였다.
첫 장을 펼치면 나오는 박경리의 시 ‘홍합’. ‘내 고향 남쪽 바다'...
남쪽 바다는 ‘고향'과 ‘그리움'이 결합될 때 가장 그에 알맞은 색을 입는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통영, 아빠의 바다'를 보니 나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그림과 글에서 ‘고향'과 ‘그리움'이 물씬 풍겨난다.
이 책은 그림이 가득하다.
통영이 고향인 화가와 그의 딸의 조곤조곤한 대화와 함께.
화가는 고향을 그리고, 그 딸은 그림의 이야기를 적는다.
이야기는 화가의 기억 속의 따뜻한 고향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빠로서의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이기도, 그의 손주들에 대한 꿈의 이야기이기도, 자신의 그리운 소년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림에는 색채가 담뿍 들어있다.
따뜻함의 색채.
고향의 색채.
아빠의 색채.
옛 그리움의 색채가 가득하다.
그림을 모르는 내 눈에도 보이는 색의 향연이 가득하다.
그 향연은 아마도 내 마음으로 느껴지는 색인 모양이다.
남쪽 나라 하면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시인. 백석 시인 또한 통영을 그리움으로 삼았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얻지 못했기에 영원히 사랑할 수 있었던 여인 ‘난'의 고향이 바로 화가가 태어난 통영 명정동이었다. 그 여인이 백석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현중과 결혼하는 바람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상처는 깊었지만, 백석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어쩌면 다행인 일이다. 남쪽의 따뜻한 도시 통영은 그로써 그리움의 시, 그리움의 색채를 입었기 때문이다. 백석은 여러 번 통영을 오가며 이 남촌의 정취를 시로 남겼다.
신기하게도 화가의 그림에서도 백석의 시가 보인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은 그 곳.
이 아름다운 그리움의 시가
화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며칠째 아이와 함께 그림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큰아이의 갓난쟁이 시절을 보낸 곳. 미국에서 자란 아이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관한 이야기. 엄마의 산너머 남촌 노래 이야기. 책에 실린 화가의 해저터널 등하교 이야기 등… 책 한권에 이야깃거리가 족하고도 넘친다. 한국에 대한 기억도 많지 않고, 통영을 가본 적도 없는 딸아이는 그럼에도 색색의 따뜻함이 입혀진 책을 제 것이라며 제 책꽂이에 갖다두려 욕심을 부린다.
어쩌면 남쪽나라에 대한 그리움은
비단 나만의 것,
고향이 통영이라는 화가의 것,
첫사랑의 연인을 통영에 둔 시인 백석의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마음에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 모두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