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라면 품위를 지켜야 하는 법

소공녀 little princess

by 밤호수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장편소설이란 것을 알고 이는가? 기승전결이 완벽한, 독자에게 완전한 클라이막스를 선물하는 책이라는 것은? 아동학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많이 반영된 책이라는 것은?

이 책은 미국의 소설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1988년 발표한 소설. 그의 3대 작품인 ‘소공자 - 소공녀 - 비밀의 화원' 중 2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잡지연재를 하던 작품을 연극화하고 다시 소설화하면서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개작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전에 ‘한옥일기 - 나의 유년의 책'에서 소개한 바 있는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의 파란색 버전 중에 ‘소공녀'가 있었다. 그 책을 얼마나 마르고 닳게 읽었었는지! 새라가 ‘무용 수업'에서 돌아와 장밋빛 드레스에 장미화관을 쓰고, 자신의 의자에서 잠든 재투성이 ‘베키'를 바라보는 그림은 지금까지 머리 속에 선명하다. 그림속의 새라는 적어도 열 다섯살은 되어 보였는데 이제 읽으니 겨우 일곱 살(작품에서 자꾸 커서 나중엔 열 서너살까지 되는 것 같다)!!!

밀리 서점에서 ‘소공녀'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자기 전 딸아이에게 몇 장씩 읽어주고 있다. 그러다 너무 재밌어서 딸아이 잠든 후 혼자 다 읽어버렸다.

역시, 기승전결 완벽한 재밌는 소설이다. 선과 악의 지나친 뚜렷함에 현실성이 떨어지고, 인물들에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뭐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니까. 그걸 고려하면 정말 재미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사라

세상에서 가장 조숙한 일곱 살 짜리 소녀.

세상 부족한 것 없이 인도에서 ‘부유한 영국 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아가씨로 살아왔지만, 조금도 응석받이라든가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우연히 생기는 일이 많아. 내게는 좋은 우연이 많이 따랐어. 어쩌다 보니 늘 공부하고 책 읽는 게 좋았고, 배우고 읽은 걸 잘 기억하게 되었지. 또 어쩌다 보니 잘생기고 다정하고 머리 좋고, 내가 좋아하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거고. 난 본래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고 모두들 잘해 준다면, 누구라도 착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거 아닐까?>

<공주라면 품위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민친 선생


이 소설 최대의 빌런. 악의 화신.
개연성을 전혀 부과해주지 않는 인물.
처음부터 끝까지 돈만 밝히는 못된 캐릭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동학대를 서슴지 않는다.

<크루 대위가 죽었다. 땡전 한 푼 남기지 않고 죽었어. 그 버릇없고 제멋대로 굴고 환상에 빠져사는 아이는 거지가 되어 내 손에 맡겨졌지.>

<사람들이 널 좋아한다느니 하는 그 따위 허튼 소리는 집어치워. 그것말고도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심부름도 다녀야 하고. 교실에서는 물론 부엌일도 거들어야 한다. 내 눈에 거슬리면 그 길로 내쫓을 테니>

다이아몬드 광산과 사라의 열한 살 생일 파티



<아주 으리으리한 비단 드레스로 차려입은 민친 교장이 사라의 손을 잡고 함께 앞장섰다.


이건 보통 경사가 아니다. 네 생일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치른다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구나.>

​과장되고, 앞뒤가 다르고, 돈 앞에서 무엇이든 하는 민친 선생의 정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새라의 생일파티 장면이다. 새라의 아빠에게 들려온 다이아몬드 광산 이야기는 모두를 열광하게 만들었고, 그 어마어마한 재산의 일부가 자신의 학교로 돌아올 것이라는 상상은 민친 선생을 몹시 들뜨게 했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그 순간, 바로 크루 대위의 사망 소식과 함께 파산 소식도 알려지는 것이다. 어릴 적에 나는 이 장면을 빨리 넘기곤 했다.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받아들이기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다락방의 마법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였던, 다락방의 마법들. 기억하시는지? 영화로도 여러번 봤지만 볼 때마다, 읽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장면.
옆집 람다스와 주인의 계획으로 사라의 차가운 다락방은 밤 사이에 공주님의 방처럼 따뜻해지고, 맛있는 것이 가득해지고, 실크 이불이 덮힌다.

<벽난로 안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벽난로 안쪽 선반에서는 놋쇠 주전자가 쉭쉭거리며 끓고, 바닥에는 두툼하고 따뜻해 보이는 다홍빛 양탄자가 깔려있는 데다가, 벽난로 앞에는 쿠션까지 갖춘 접이식 의자가 있었다. / 게다가 침대에는 따뜻한 새이불 몇 가지와 비단 홑청으로 씌운 솜털 누비이불 한 채가 놓여 있었다. >

​<사라와 베키는 수프와 샌드위치와 머핀을 홍차와 함께 먹고,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 앞에 앉아 황홀해했다. >

<마침내 떨쳐 내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을 휘감아 오는 달콤한 잠은 하늘이 내린 축복과도 같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 배불리 먹고 난 후처럼 사라는 이글거리는 난롯가에 앉아서 마음껏 불을 쬐다가 졸음이 쏟아지는지 몸을 돌려 완전히 달라진 침대를 바라보았다. >

​얼마나 근사한가!
다락방 창문을 통해서 꾸민 멋진 선물! 꿈을 현실로 이루어준 마법! 언제나 머리속에서만 ‘여기에 난로가 있다면 ‘’이것이 먹을 것이라면' 상상한 소녀 사라에게 그 꿈이 근사하게, 그 이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라는 이제 아무리 민친 교장이 괴롭히고 고된 일이 기다리고 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클라이막스 - 이 아이다!



- 네 아버지 성함이 무엇이냐? 말해다오
- 우리 아빠 성함은 랄프 크루예요, 크루 대위. 인도에서 돌아가셨어요.
- 카마이클, 얘가 바로 그 아이네, 그 아이야!
- 저분이 네 아빠의 친구란다. 너무 놀라지 말거라. 우린 널 두 해 동안 사방으로 찾아 헤맸어.

​절정의 장면이다.
이 장면만 보면 행복해진다.
그리고 사라가 민친선생에게 통쾌하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

<민친 선생님, 선생님이 자선을 베풀어 받아주셨다는 사라 크루보다 더 큰 부자가 될 공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캐리스포드 씨는 그동안 두 해 가까이 사라를 찾으려 애썼습니다. 드디어 이렇게 찾았으니 이 아일 거둘 겁니다. >

<이제 넌 다시 공주가 된 기분이겠구나>

<저는 진짜 공주처럼 행동하려고 애썼을 뿐이에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춥고 배고플 때조차도.>

옆집 대문 앞에 늠름한 말들이 끄는 마차가 서 있었고, 그 마차의 주인과 포근하고 화사한 모피 옷을 따뜻하게 차려입은 어린아이가 계단을 내려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는 민친 교장에게 지난날을 더듬어 보게 하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뒤로 역시 낯익은 아이가 따르고 있었는데 누군지 알아본 순간 민친 교장은 속이 뒤집혔다. 그건 즐겁게 시중꾼 노릇을 하며 외투며 소지품 들을 들고 어린 마님을 마차까지 배웅하는 베키였다.




By 밤호수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네 살부터 1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을 한데 데려다 놓고, 숙녀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저런 민친 선생과 같은 교장 밑에서 기숙생활을 시킨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도 없는 네 살짜리 여자아이(로티)가 도대체 어떻게 적응을 하겠는가! 도대체 숙녀가 되기위한 교육이 무엇이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던 걸까.)

이 소설의 악의 축 민친 선생과 돈없는 아이를 착취하는 사회 구조에 맞서는 것은 사실 다시 부자가 된 사라의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라의 ‘강인한 정신’이다.

어린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하고 차분하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늘 ‘공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라의 태도 덕분에 악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신을 박탈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작은 공주, 소공녀를 보면서 민친 교장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굶기고 악을 써도, 사람의 정신만큼은 황폐화시킬 수 없음을 다시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언제 봐도 재밌는 소설 소공녀.
오늘 밤엔 딸아이랑 같이 영화를 다시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