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가 전하는 청춘의 푸르름

청춘은 아름다워) by 헤세

by 밤호수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남학생에게 책을 선물받은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흰 얼굴에 다정한 눈빛을 지닌 그 아이가 내게 건넨 그 책은 헤세의 책 ‘청춘은 아름다워라 ‘였다. 그토록 떨리는 손으로, 내 이름을 정성스레 적어 건네 준, 그것도 헤세의 책.


안타깝게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읽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헤세가 안내하는 티없이 순수하고 맑은 청춘의 안내에 나는 흡수되지 못했다. 나를 ‘헤세'나 그 아름다운 글들과 어울리는 여학생으로 봐준 것은 몹시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 때 나는 학교 친구들이랑 ‘다락방의 꽃들’이니 하는 꽤 수위높은 로맨스소설에 빠져있을 때였다.

지금도 헤세를 볼 땐 저절로 떠오르는 그 아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20대가 되고나서 헤세를 다시 알기 시작했고, 청춘의 열병을 앓을 때 헤세의 글들은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청춘을, ‘내 인생의 가장 푸르르고 뜨거운 시절’을 통과해온 나는 다시 헤세를 읽는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 ‘나에게 괴로운 일이 밀어닥치더라도 지난날의 즐거운 추억은 미래의 행복한 날을 기대하는 것보다 나에게 훨씬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거니와 이제 청춘 시절과 작별을 해야 할 때이므로 나는 그 여름날의 추억 속에 아직도 또렷이 남아 있는 일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서,
오랜 공부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년의 마지막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며
사랑과 따뜻한 자연을 느끼는
행복한 마지막 청춘의 여름.

그 상쾌함과 즐거움
사랑과 애정과 청춘의 혼란이
헤세 안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고향

고향의 골짜기에서 시작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그리운 추억들이 되살아나자 귀향의 감정에 들떠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려던 나의 허영심은 감사와 경탄의 마음으로 변했다.

- ‘나는 기쁨이 넘쳐흘렀으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으며 마음이 바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고향을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가족

- ‘아버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내게 다가와 키스를 하고 나서 어깨를 토닥거려 주셨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잡고 2층의 방문 앞까지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와락 껴안아 주셨다. ‘

-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면 언제나 즐거웠다. 우리들은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로테는 피아노를 치고, 플리츠는 바이올린을 켜고, 어머니는 우리가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으며, 폴리는 새장 속에서 재잘거리며 잠도 자지 않고 있었다. ‘

자연

- ‘그 꽃은 학창시절의 소풍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유난히 좋아해 스스로 이름을 지어 부른 꽃도 찾았다. 어떤 꽃을 보더라도 옛날의 추억이 되살아 났으며, 노랗고 푸른 덤불을 보아도 나의 어린 시절이 몹시도 그립고 친밀하게 되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

사랑

유년과 청춘의 경계에서, 사랑은 아직 설익다. 스스로 농익은 잘 익은 사과같다고 느끼지만 결국은 풋사과에 불과함을 시간이 지난 후에 느낀다.

- ‘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 비치는 금빛 촛불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깨가 약간씩 출렁이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저 머리카락에 손끝이라도 대어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

-‘당시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오로지 헬레네 크르츠와 그녀를 찬미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도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잠시 동안 나를 움직였다가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 ‘이날도 유난히 아름다운 헬레네 크르츠와는 괴상한 이야기만 하면서도 무척이나 정중한 태도로 말해야 했다. 그러나 안나와는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를 긴장하지 않고 쉽게 할 수가 있었다. ‘

아름다운 헬레네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집에 묵고 있는 안나와 편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안나와 훨씬 더 대화가 잘 통하고 좋은 여인이라는 걸 알지만 헬레네의 도도한 아름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런 게 설익은 사랑이지!) 그러나 헬레네는 곧 약혼을 한다. 다른 사람과. 아름답고 품위있는 헬레네의 추억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나'의 마음은 곧 안나에게로 향한다. (이것도 청춘의 특징이 아니던가!)

-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는 저 아름다운 헬레네 크르츠를 이렇게도 빨리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

- ‘첫째로 헬레네를 향한 연모의 정은 누구나 소년 시절에 겪는 사랑의 질병에 불과했다. 둘째로 그 여자의 미모가 나를 현혹하였다. ‘

‘나'는 안나에게 고백하려 하지만 그 또한 안나의 저지로 무산된다.

- ㅡ나는 그날 오후 안나가 따뜻한 마음으로 나의 슬픔과 굴욕을 위로해 준 일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하고서 진심으로 아름다운 우정을 가지고 나를 대해 주었다. ‘



​이렇게 여름날의 풋사랑들은 모두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채 끝나고 말았다.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시절의 아름다운 짝사랑과 채 달아오르지 못한 열정을 잘 보여주는 묘사들. 스스로를 위안했다 절망했다를 반복하는 예민한 감성들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지!

청춘

- ‘나는 아직도 무의식 속에서 청춘 시절의 들떠 있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의 생활은 아직도 우연과 행운과 행복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

- ‘그러한 생활 속에는 뚜렷한 하나의 의의와 법칙이 있었다.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신앙을…….’

작별

- ‘나는 차창에 기대어 거리를 바라보았다. 가로등과 붉게 물든 창문에서는 불빛이 비치었다. 플리츠가 두 손에 불꽃을 들고 서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손을 흔들면서 플리츠 앞을 지나가는 그 순간, 그는 재빠르게 올려치기 불꽃을 번쩍 쏘아 올렸다. ‘

-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어 불꽃을 쳐다보았다. 불꽃은 잠시 공중에 떠 있다가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면서 빨간 불꽃으로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By 밤호수

그렇게 여름은 끝났고, 아름다운 소년시절의 달콤한 청춘도 여름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청춘은 영원하고 아름답다. 햇살 내리쬐는 여름날의 푸르른 자연처럼 찬바람이 불면 사라지기에 청춘은 더욱 영원하다. 헤세의 영롱한 문장 속에서 영원하다.

헤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등의 작품도 물론 좋아하지만, 헤세의 초기 작품들이나 유년, 청년시절의 순수함을 다룬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작품들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그 남학생에게서 받았던 진짜 소년 시절에 이 작품의 진가를 몰라줘서 미안할 지경이다.)

이 작품은 1970년에 발표되었고, 청춘의 아름다움과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고향의 따스함, 유년시절 이후 몰랐던 고향과 자연의 빛남과 그리움을 헤세 특유의 맑은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날의 나의 역시 철없던 짝사랑이 생각나 괜히 얼굴이 함께 붉어지기도 하고, 가본 적 없는 독일 작은 시골마을의 숲 속에 누워있는 꿈을 꾸게 되기도 한다.

청춘은 아름답다.
여름날의 절정처럼
반짝이기에 아름답고
소멸하기에 아름답다.
추억 속에 영원히 맑은 구슬 안에 담겨있기에
영롱하게 아름답다.

작품 속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아련한 청춘의 속삭임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