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년의 책 이야기
그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많은 장면 중에 하나가 어딘가에 박혀서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다.
대청마루, 나무 위, 언니들과 함께 쓰던 방의 책장 앞 의자, 할머니방 아랫목 등등...
엄마아빠도 늘 바쁘셨고 또 막내여서 언니들이 학교에 간 시간 집에서 홀로 있던 그 때부터 난 참 많은 시간을 책과 함께 했다. 옷도 제대로 안 입고 팬티만 입고 다니던 내 손에는 늘 여러가지 책이 들려 있었고, 글이 모르던 시절부터 그들은 나의 친구였다.
기억나는 최초의 책들은 ‘브리태니커 어린이 백과사전’이다. 글을 언제 깨우쳤는지 기억이 확실친 않지만, 이 책은 글을 알기 전부터 사랑했던 책이었던 듯 하다. 그 안에 담긴 다양한 활동, 그림, 만화 등, 이국적인 이 책들은 나의 마음을 빼앗았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종이로 이층 집을 만들어 인형놀이를 하는 것과, 우유를 만드는 과정을 만화로 표현한 것이었다. 금발머리 여자아이가 ‘우유가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농장에 가서 직접 소젖을 짜고 그 우유를 공장에서 소독하고 팩에 넣어 포장까지 하는 과정을 두 장에 걸쳐 표현한 만화였는데 글을 모를 때부터 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었다. 금발머리 여자아이 머리스타일까지 생각나는데, 너무 다시 읽어보고 싶다.
대청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서 할머니가 말려놓으신 곶감을 먹으며 책들을 읽는 기분은 얼마나 황홀했는지!
아. 또 글씨를 모르던 무렵 좋아하던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엄마의 요리책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80권짜리 손바닥만하던 요리책.
온갖 요리가 다 담겨 있었는데 하나하나 얼마나 열심히 보았는지 아마 엄마보다도 내가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어릴적에도 워낙에 잘 먹었고, 지금도 먹는 데는 어딜가나 빠지지 않는 먹성을 자랑하는 나의 먹거리 관심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리는 못한다는 게 함정이다. 특히 베이킹)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책은 ‘빵.과자.케이크'라는 제목. 맛있어 보이는 각양각색의 쿠키는 언제나 식욕을 자극했다. 특히 ‘딸기생크림케이크'가 단연 최고였다. 삼단 케이크에 딸기로 장식된 그 케이크의 사진은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엄마에게 매일 만들어달라고 조르곤 했다. 방학 때면 가끔씩 엄마가 비슷한 걸 만들어주시곤 했던 것 같다. 지금 매일 베이킹을 하자고 조르는 딸내미를 보면 똥손 엄마의 베이킹 실력이 못내 미안해지곤 한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독서 생활이 시작되었고, 파란색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소공녀', ‘작은 아씨들'은 단연 나의 가장 사랑하던 책이었고 ‘아라비안 나이트', ‘영국 이야기' ‘독일 동화집' 등도 재미있었다. 으스스한 ‘한국 전래동화 이야기'도 좋았고. (이 책에 빨간 병 파란 병 하얀 병 이야기가 있었다!!) 어두운 방 안 책장 앞에서 불도 안 켜고 책을 읽던 생각, 내가 좋아하던 나무, 옆으로 죽 뻗어서 앉기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마당 나무 위에서 ‘작은 아씨들'을 읽던 기억들.
‘소공녀' 책 군데군데 삽화가 있었는데 그 그림들을 보면서 가본적 없는 영국의 기숙사 학교를 꿈꾸어보곤 했다. ‘작은 아씨들'에서는 에이미가 아홉살인가 그랬는데 나도 아홉살이라 (한국 나이로) ‘나는 막내 에이미야. 에이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아'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집에는 정기적으로 계몽사 문고 판매하시는 아주머니가 드나들곤 하셨는데, 그 때마다 엄마가 또 무슨 책을 사줄까 고개를 빼고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싶었던 몇 세트의 책들은 끝까지 사주지 않으셨는데,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 책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첫 번째는 핑크색 하늘색 디즈니 명작 전집 세트였다.
구피와 미키마우스, 미니마우스 등을 주인공으로 한 디즈니 그림책. 특히 ‘세 마리 아기돼지'의 집짓기 이야기가 있던 책이 기억난다. 이 책은 ‘디즈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꼭 갖고 싶었는데 우리집엔 없고 작은집에 있어서, 제사 때 가기만 하면 열댓권씩 읽고 오곤 했다.
또 하나는 ‘계몽사 세계의 명작'.
이 책은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푸른 수염' ‘백설 공주' 등이 있는 이 이야기책은 그림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부드러운 실크 옷감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푸른 수염'을 읽을 때면 그 오싹한 기분과 아름다운 드레스가 묘하게 어울려 재미를 배가시켰다.
친한 친구네 집에 책이 있었던 덕분에, 갈 때마다 보곤 했다.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 책에 있어서 책가방을 벗어던지자마자 책으로 빠져들었다. (요즘 이 책들이 다시 재판되어 팔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
나의 책 인생에서 중요한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이야기 테이프’ 이다.
한옥집 언니들과 함께 쓰던 방에서 우리의 의식 중에 하나는 잠들면서 꼭 이야기테이프를 듣는 것이었다. 60개인가 커다란 테이프 전집이 있었고, 이불을 깔고 잘 준비를 다 하면 엄마가 테이프를 틀어주고 나가곤 하셨다.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성우들의 맛깔진 목소리와 노래가 나오는 테이프가 시작되면 깜깜한 방 안에서 나는 꿈과 모험의 나래를 펴곤 했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린이여 날아라~ 어린이여 모여라~’(맞나?) 뮤지컬배우 윤복희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피터팬'이다. 웬디와 피터와 함께 네버랜드를 향해 날아가던 이야기는 곧 나의 어린시절의 꿈 속 모험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강렬한 이야기는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풍뎅아 날아라~ 풍뎅아 돌아라~’ 고 외치던 여자아이의 이야기이다. 풍뎅이를 잡아서 괴롭히다가 나중에 벌을 받는 스토리였던 것 같다.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이야기를 들으며 언니들과 함께 잠들던 그 시간의 기억들.
별과 이야기와 자매들이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상상을 펴고, 밤하늘을 날게 하고, 꿈을 자라게 했다.
겨울이면 이야기 대신 똑순이의 캐롤 송을 듣기도 했던 그 시간들.
이 외에도 하고 싶은 책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밤을 새도 다 못할 듯해서 이 정도로 해야겠다. 본격적인 역사와 세계 책들, 그리고 소녀다운 감성의 명랑만화로 빠지기 전의 내 유년시절의 책 이야기이다.
계절마다 다른 마당의 풍경이 펼쳐지던 그 집에서 나와 책과 이야기가 함께 하던 그 시간. 그 시절.
나는 이야기 속에 있었고, 책 속엔 내가 있었다.
마당과 대청마루와
오래된 의자와 부엌의 아궁이 앞에도
나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 속에 나의 유년시절이 있었다.
아랫목 위에서 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이야기를 읽었고,
뭔지 모르는 실크 드레스와 벨벳 모자를 상상했고,
소공녀 세라의 인형 에밀리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색색깔의 물고기를 그렸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들, 인도, 영국, 중국, 프랑스를 꿈꿨고, 걸리버와 함께 소인국 거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한옥 집 안에서,
그 안의 또다른 세상 책 안에서,
섬세하고 풍요롭게,
아름답고 두근두근하게
인생의 첫 여정을 시작했다.
* 이 이야기는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