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도 7.
새벽부터 눈이 한두 송이씩 흩날렸다.
'뉴욕의 눈내리는 날'이었다.
호 불면 입김이 서리고, 금세 얼굴이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추운 날씨였지만,
롱아일랜드의 기숙사 집에서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할 준비를 했다.
화장도 하고, 단정하게 옷도 신경써 입었다.
12월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미국에 와서 일년인가 지났을 때,
뜻밖에 나에게도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비록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뿐이었지만.
가르치고 싶었던 나에게, 교실이 그리웠던 나에게 참으로 다행스런 기회였다.
뉴저지에 있던 '한국학교'의 교사가 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후원하는 한국학교는, 주재원 자녀들을 위주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등을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쳤고, 50퍼센트가 한국의 교직 호봉으로 인정되는, 여러모로 알찬 학교였다. 박봉의 레지던트 월급에, 적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것은, 다만 하루라도 나만의 시간.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이었다. 남편이 2년차가 되어, 토요일 낮에 쉴 수 있게 되자, 그 날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뉴저지로 향했다.
롱아일랜드에서 뉴저지,
그것도 학교가 있는 뉴저지 한참 안쪽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출근 시간만 차로 한시간 이십분 정도가 걸리는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시간이 좋았다.
음악을 틀고 가는데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불렀다.
학교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하며 달라붙어 귀찮도록 말을 걸고 진이 빠지도록 수업을 했다. 온전히 '나'로 돌아와 갖는, 특히 남이 해주는 점심시간은 무엇이든 맛있었다. 유난히 까탈스러운 우리 아들과 남편이 잘 있을지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어깨로부터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것 같아,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오후가 되어가자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창밖으로 점점 세상이 하얘지고 있었다.
춥기도 추워 보였다.
하지만 교실 안은 더 따뜻했다.
뉴저지의 어느 중학교를 빌려서 하는 수업이었다.
교실은 안락했고, 눈내리는 어느 뉴저지의 마을은 제법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퇴근길이 문제였다.
길이 미끄러워 웬만하면 롱아일랜드까지 건너가지 말라고 선생님들이 말렸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이 되면 남편이 일하러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조지워싱턴 다리를 지나가는 길목은 뉴저지를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가득했다.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롱아일랜드는 커녕 뉴저지를 빠져나가는 데만 이미 한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남편은 초조한지 자꾸 전화를 했다.
'조심히 오라'면서도, 자신의 출근시간이 걱정되는 듯 했다.
차는 꽉 막히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창에 가라앉은 하얀 눈은 와이퍼로를 잘 없어지지도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씨디를 틀었다.
uptown girl.
웨스트라이프의 노래.
한국에 있을 때 특별한 인연의 첫 제자가 주었던 씨디.
그 아이 생각을 하며.
씨디를 넣었다.
볼륨을 올렸다.
꽉 막힌 도로에서 나는 차창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
눈이 시려왔다.
눈내리는 뉴욕의 하늘.
눈은 그토록 펑펑.
그토록 아름답게,
그토록 할 말이 많은 듯..
나를 향해 내리고 있었다.
순간 눈을 살짝 감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편도, 아이도,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아이 엄마도, 아내도 아니었다.
나는 눈을 느끼고,
세상의 모든 하얀색을 내 마음에 간직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는 그 뿌듯한 순간을 기억했다.
내가 나로 돌아간 하루의 시간을 내 안에 담았다.
행복했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의 출근은
불과 한 학기로 막을 내렸다.
남편이 더이상 아이를 봐줄 수가 없었고, 누구에게 아이를 맡길 형편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짧은 기간의 출근을 잊지 않는다.
힘들었던 뉴욕 생활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자유를 주었던 기간이었으므로.
다시 국어교사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시간이었으므로.
휴직은 벌써 4년째로 들어서고 있었고,
몸과 마음은 육아와 이민생활로 녹초가 되어가고 있을때 생긴 기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국어교과서를 가지고, 주재원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시간.
한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먼 곳에 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면 집안은 초토화되어 있고, 남편과 아이를 걷어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제 한국에 돌아갈지도,
언제 다시 교편을 잡을지도,
이곳에 자리를 잡을지도,
모든게 까마득하고 불투명한 시기였다.
그치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매일매일 생각했다.
'나는 국어교사다!'
'나는 순수한 우리말을, 우리글을, 우리 문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하는 국어교사다!'
그리고 그것은 휴직 4년차였던 그 때도,
퇴직교사인 지금도 내 인생의 정체성이다.
그 마음 덕분에 지금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그 이후, 많은 한국학교, 한글학교에서 가르쳤지만,
대부분 한국말이 서툰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개념이었기에 제대로 '국어'를 가르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은 나에게 특별한 시간이었고,
마지막 '국어선생님'의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눈이 오던 조지워싱턴 다리.
그날의 초조했던 마음.
그날의 설렜던 마음.
눈이 가득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날의 하늘을.
눈이 너무 가득해서 마음이 아득했던 그 날의 하늘을.
롱아일랜드 낡은 병원 기숙사로 돌아가던 나의 가난하고 행복했던.
그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