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도 8.
“언젠가 자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난다면 그 때 못본척하지 말고 꼭 도와주게. 그게 바로 나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던 분이 계셨다. 선한 눈매와 서글서글한 말투로 언제나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시던 선량한 의사선생님. 그리고 그 분의 아내. 낯선 이국의 땅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한국인 의사선생님.
남편은 허리디스크라는 고질병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인가 농구를 하다가 한번 터진 디스크는 인턴 때 한번, 레지던트 2년차 때 한번. 이렇게 가장 고생을 하던 시기에 한 번씩 도지면서 의사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위태롭게 했다. 미국에 와서도 가장 힘들었던 내과 시절에 역시 디스크가 재발했다. 닥터 S의 도움으로 휴식을 취하게 된 후, 마음을 굳게 먹고 병원으로 돌아갔지만 가장 문제는 허리였다. 정신력으로 버틴다 하더라고 육체적인 병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더구나 미국에서 치료를 받기란, 그것도 24시간, 아니 36시간씩 근무를 하는 의사가 병원 스케줄에 맞춰 진료를 받고 물리치료를 받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미국에 살아본 분들은 알 것이다. 이곳에서 내 맘에 맞게 치료를 받고 의사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지. 당장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한국처럼 가서 치료받고 포도당주사를 맞을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남편은 간신히 예약을 잡고 한달 뒤, x레이를 찍고, 또 물리치료 예약을 잡는데 몇 주. 그러고나면 병원 시간에 맞춰 갈 수가 없어서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허리는 점점 더 나빠졌다.
“여보. 한국에서는 원하면 바로 가서 통증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선 이렇게 진료 한번 받기가 힘드니 이러다가 허리 때문에 다시 쓰러지겠어.”
불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조금 더 멀리 나가서 플러싱 한인 타운에 있는 통증병원들을 찾았다. 몇 군데인가에서 새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화한 ‘이xx 통증클리닉’. 여자분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남편 허리 때문에 진료 받고 싶어서요.”
“몇 시에 오실 수 있으세요?”
“남편 근무가 늦게 끝나는데, 저녁늦게 가도 될까요?”
“저희는 7시에 끝나는데, 많이 아프세요?”
“네.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허리 통증 때문에 근무가 힘들어서요.”
“선생님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나시는대로 오세요.”
너무도 감사한 말씀이었다.
그날 저녁,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플러싱 골목가에 있던 자그마한 병원에 갔다. 오피스에는 어항 안에 황금빛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었고, 카톨릭 신자이신지, 카톨릭 성경교재가 있었다. 프론트를 보고 계신 분은 의사선생님의 아내분이셨고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셨다. 미국에 오게된 경위를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옛날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적시셨다.
“80년대에 미국에 왔을 때 우리도 고생을 엄청나게 했네. 레지던트로 바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월급을 받지 않고서 몇 년을 일했어. 그 경력으로 결국 레지던트를 시작하게 된 거지. 아내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설거지며 식당일이며 안한 게 없고. 아이들이 맥도날드 빅맥이 먹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사줄 돈이 없었다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우린 그래도 맥도날드 빅맥은 언제든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훨씬 낫구나,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그로부터 2년 넘게, 우리가 뉴욕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선생님은 언제든 남편이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자네 편한 시간에’오라 하시며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우리를 기다려주셨다. 꼼꼼하게 통증을 치료해 주심은 물론이고, 좋은 말씀으로 늘 지친 남편을 위로해 주셨다. 이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다.
첫째로는 우리를 가엾게 여겨주시는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고, 둘째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남편의 바람이었다. 환자들 하나하나에게 섬세하신 마음과, 자신이 힘들더라도 환자를 챙기시는 태도.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환자로 오가며 양쪽을 경험하는 남편에게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을 선생님의 큰 도움을 받아, 우리는 무사히 레지던트 기간을 마쳤다.
선생님께 자그마한 선물과 카드를 써들고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날.
선생님께서는 우리 가족 모두를 고깃집에 데려가셨다. 그땐 우리 형편에 엄두도 안났던 한국 고깃집. 제일 비싼 걸로 맘껏 먹으라 하셨다. 거기에 떠나는 우리의 주머니에 300$이란 거금이 들은 봉투를 안겨주셨다. 친척도, 동료도, 심지어 같은 학교 후배도 아니었던 우리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셨던 두 분.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닥터홍. 내가 예전에 미국에 와서 그토록 고생을 할 때, 우리 가족을 불러 먹여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신 은인이 나에게도 있었네. 이방인으로 살면 그렇게 힘든 삶을 누구나 겪게 되지만, 그럴 때 또 도움의 손길이 있게 마련일세. 닥터홍도 자리를 잡고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걸세. 그때,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꼭 도와주게나. 그게 나에 대한 은혜라면 은혜를 갚는 길이네.”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삶에서 진정으로 나온 말씀이었기에 우리는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남편의 후배들이나 지인들이 갈 길을 헤매며 도움을 청할 때에도, 나와 남편은 늘 그 말씀을 생각했다. 우리의 지금은 다른 분들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 또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다. 라고.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두분의 얼굴은 이제 희미하지만 그 마지막 말씀만큼은 기억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