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착 스토리 9.
힘든 시절이었다.
까탈유난까칠의 대명사인 세살배기 아들과,
다시 시작된 입덧 사이.
혼돈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1년이 되어가지만,
나에겐 아직도 '친구'라 이름할 만한 사람들조차 없었다.
아들과 또래의 엄마들 몇 몇을 사귀었지만,
까칠한 우리 아들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버렸고,
나에게 막말을 하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고,
나는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다시금 시작된 2010년의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세살이 넘은 아들이 학교에 처음으로 간다.
이제 나도 새출발을 할 수 있으리라.
학교는 lutheran 기독교 학교였다.
그렇게 크진 않지만,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이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은 근사한 예배당에서 예배도 드렸다.
아이는 쉽게 적응하지는 못하였으나,
따스한 선생님들 덕분에
서서히 첫 사회에의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녀들을 만났다.
첫 번째 그녀. H.
롱아일랜드 사교계의 여왕.
처음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루터란 스쿨에서 마주친 나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뉴욕에 정착한 이후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러브콜을 적극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던지라, 처음에는 오히려 움츠려들었으나, 그런 그녀의 적극성에 어느샌가 나도 그녀의 사교계 그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교계의 여왕일 뿐 아니라 살림을 너무도 야무지게 해서 청소, 금융, 집안 대소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허투른 면이 없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와 병원에서 지내고 있던, '골골대는' 그녀. 믿을 수 없는 이 조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대체 언제 살림을 하는 건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가사의이다. 거기에 말만하면 빵빵 터지는 유머가 가히 역대급.
두 번째 그녀. R.
나와 같이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던 그녀는 야무진 두 딸아이의 엄마였다. 왕방울만한 두 눈에 전문직으로 일까지 하고 있던 탓에 첫 느낌은 감히 쉽게 말을 걸기도 힘들었다. 얼마나 깐깐하고 완벽해 보였던지. 그런 그녀가 H와 함께 나의 주위를 버텨 준 두번째 '롱아일랜드 언니'가 되었다.
베이킹과 요리의 고수. 잠을 하루에 여섯 시간도 안 자면서(나에겐 이게 제일 신기!) 완벽주의를 완벽하게 해 내는 사람. 지금도 나는 그녀를 '욕쟁이 할머니'라고 놀리지만, 그런 그녀의 깐깐함과 완벽주의조차 사랑스러운 여인. 거기에 유머 감각은 H를 능가하여, 우리 엄마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유머를 가장 좋아한다.
세 번째 그녀. N.
미인대회 출신의 그녀.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똑 닮은 흰 얼굴에 긴 생머리. 그림같았던 그녀가 늘 둘째의 유모차를 밀고 학교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딘가 그늘이 진 것 같은 우수어린 표정에 그 미모하며, 말 걸기도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 역시 H의 사교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단 우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그녀는 더는 이 조직을 나갈 수 없었다.
청순한 외모로 말썽꾸러기 아들을 부를 때면 복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발성으로 아들을 그렇듯 불러제끼던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다. 세련된 외모와 달리 아이 넷의 엄마가 된 지금도 날마다 막걸리를 담그며 한국의 '전통주계승자'를 꿈꾼다.
그리고. 네 번째 그녀. 바로 나.
모두가 나를 보고 '깍쟁이'인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도 첫인상만 보고 많이들 듣는 소리이다) 알고보니 빈틈이 99%인, 도대체 선생을 했다는게 의심스럽고, 애를 낳고 사는게 신기한 존재라고들 한다.
그냥 두면 뭐든 제대로 하는게 없어서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챙김을 받고 사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그녀들을 두고 나는
‘Food and the city'드라마를 쓰리라 생각했다.
Sex and the city만큼 우아하지도,
쇼핑을 할 수도 없으나,
적어도 '먹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넷이었기에.
요리에 탁월한 R덕분에 베이킹 수업도 받아보고 (전혀 기억나지 않고, 따라할 수 없으나),
갖가지 맛있는 요리를 맛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들만의 Food and the city.
적어도 우리도 '뉴욕'이 배경이었으니,
흉내는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들은 그 무엇보다 나에겐 각별했다.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녀들이 외로운 뉴욕생활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괜찮아'를 말해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죄책감과 컴플렉스, 우울함으로 점철된 육아의 시기였다.
나 때문에 아이가 이렇게 까칠한 걸까 라는 생각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움츠려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입덧까지 하면서 우울이 땅을 파고 들어가던 시기였다.
그때 나타난 그녀들은 날 웃게 하고,
'넌 잘 하고 있어! 괜찮아.넌 대단해!'
라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우리 아이에 대해서도
선입견 대신 '다양성'의 눈으로 바라봐 주었고,
괜한 충고 대신 웃어 넘겨줄 줄 아는 여인들이었다.
'내 애는 안 그래. 내 아이는 순하고 착해'라는 은근한 자랑 대신
'아이들은 다 소중하고 다양하다'라는 마음을 지니는, 진짜 엄마들이었다.
그 위로는 그때의 나에게 진실로 필요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해는 가식이 아닌, 그녀들의 품성과 사고,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이런 그녀들의 개성이 만나서, 우리는 '관계'를 형성했고,
지금까지도 그 끈끈한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N이 미의 사절단 답게 군인인 남편을 따라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얼마전 다시 미국에 왔기에
오랜만에 우리들의 카톡방은 불이 나고 있다.
이제 루터란 꼬꼬마 시절의 아이들은
다 고등학생들이 되어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날마다 아이들은 소소한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그렇게 자라고 있다.
그네들이 커가고 있는 만큼 우리들은 늙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엄마들.
이 여인네들.
나의 '그녀들'.
이 따뜻하고 '웃기는'여인들의 자녀들 또한
그녀들의 품성을 닮아
그렇듯 따스한 어른.
자애롭고 넉넉한 엄마 아빠가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