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터뷰

미국정착기 11.

by 밤호수

요맘 때면 남편의 휴대폰에 문자가 오고 이메일이 온다.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지원하고 있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는 문자다.


"선생님, 이런이런 병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서 인터뷰를 받았는데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 갈급한 마음.

그리고 설레고도 두려운 마음.

우리는 안다.




11월. 찬바람이 불면 다음 연도의 레지던트, 펠로쉽, j waiver등을 위한 인터뷰 시즌이 시작된다. 미국 내 의사를 지망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전 미국을 다니며 인터뷰를 보는 계절. 인터뷰를 그리 보고 다닐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고 축복이긴 하다. 서류에서 떨어져서 지원기회 자체를 못 받는 사람도 수두룩하니까.


미국에 와서 레지던트로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도 그 다음 해의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왔다. 미국에서 정신과 프로그램은 본래 4년이다. 그런데 '소아정신과'를 지망하여 2년짜리 펠로쉽 프로그램을 가게되면, 레지던트를 3년만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총 5년의 프로그램이다. 미국에 올 때부터 남편은 소아정신과를 지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에서 공중보건의를 하던 시절,

남편은 충남에 있는 '치료감호소'에 1년간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학교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따라갈 순 없었지만, 남편은 1년간 많은 것을 겪었다. 왜 아니겠는가. 감옥 안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닐테니. 처음 이사를 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치료감호소에 갔던 날이 기억난다. 공주와 대전 사이.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시골길로 빠져들어 인가가 드문, 불빛도 없는 깜깜한 좁은 길을 구불구불 차로 들어가니 <공주 치료 감호소>라 쓰여있는 정문 안으로 차가운 시멘트 건물들이 나왔다. 공중보건의들이 묶는 관사동이 하나. 그리고 바로 옆에 수감자들이 묶는 3층짜리 동이 하나. 또 다른 건물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괜시리 겁이 나서였을까.


우리가 남편의 짐을 나르기 위해 관사동에 들락날락하는 동안에도 수감자들은 창문으로 우리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었다. 굳이 편견을 갖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오싹해서 남편을 두고 가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관사동은 적어도 10년은 아무도 살지 않은 듯한, 청소는 20년은 하지 않은 듯한 상태였다. (전년도에도 사용되었다 함에도 불구하고) 음침한 것이 일제시대의 병동같았다. 대체 왜이렇게 관리가 안되는 걸까 의아했다. 치료자도 수감자들과 공평해야 하나? 관리를 해주면 안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적어도 남편 혼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신과 한 명, 신경과 한 명, 신경외과 한 명의 다른 공중보건의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왜 외과 선생님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그곳에서 수술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덕분에 신경과 선생님과 외과 선생님은 참으로 한가로운 고즈넉한 삶을 1년간 누릴 수 있었고, 정신과로 온 공중보건의 두 명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치료감호소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래도 젊은 네 명의 청년의사는 똘똘 뭉쳐서 재미난 생활을 했다. 그 어두운 관사에서 의지할 데가 없으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낸 것이다.


치료감호소 앞의 좁은 골목길에는 작은 시골음식점이 있었는데 '치킨과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공중보건의들에게 치킨과 피자가 싼 값에 제공되었고 그들은 저녁마다 맥주와 치킨, 피자를 놓고 자신들만의 파티를 열었다. 나도 방학 때 가서 먹어보았는데 맛은 별로였지만. 대신 치료감호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칼국수집은 정말 그 맛이 최고였다. 아주머니가 그 칼국수를 팔아서 벤츠를 타고다니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얼큰한 칼국수에 싱싱한 쑥갓을 가득 올려주시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지금도 그 맛이 너무 그립다) 아무튼 그렇게 네 명의 청년의사는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하지만 관사에서 살기 시작한지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잠을 자고 있던 한 명의 공중보건의(바로 남편) 위로 꽤 큰 도마뱀이 떨어진 것을 계기로 그들은 '도저히 여기선 못살겠다!'를 외쳤다. 그리고 그곳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대전 시내의 작은 원룸 네 개를 얻어 같이 그곳으로 이사를 한 뒤 그들은 '수감자'의 생활을 벗어나 자유를 누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 관사동은 좀 아니었던 것 같다. 수감자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한 의도적인 고행이라면 또 모를까. 치료감호소에서 1년을 근무하면서 남편은 Forensic Psychiatry 법정신의학. 이라는 학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 오면 법정신의학을 계속 해볼까도 싶었다. 치료감호소의 경력이 도움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법정신의학은 정말 백인들, 백인 중에서도 초일류의 과정을 밟은 사람들에게 열린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결국 원래 계속해서 원했던 '소아정신과'의 길로 마음을 정했다.




<소아정신과>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서' '다른 이를 공감하고 싶어서' 정신과를 택했다는 (정신과 레지던트 면접 때 그리 대답했다는) 남편은 한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를 4년 하며 비록 힘들 때도 있었으나 공부와 진료를 병행하며 차분히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정신과를 하다보니 그는 '본능적으로 소아정신에 이끌렸다.'고 한다.


게다가 그 때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소아정신과 '노경선 교수님'은 그의 미래의 꿈을 다져놓았다. 노경선 교수님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시고 프로그램디렉터로 오랫동안 근무하신 분이셨다. 어느샌가 남편은 그분의 길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했고, 그 영향으로 미국까지 오게 되었다.(그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꿈을 갖고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싶다던 남편의 열망.


그렇게 미국에서 일반 정신과 3년을 지내고, 소아정신과 펠로쉽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바로 그 시기.

또다시 11월의 시기가 온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인턴1년 -> 레지던트 4년 -> 공중보건의 3년 (치료감호소 1년, 삼천포 2년)-> 미국 레지던트 3년 그리고 이제 또다시 2년의 펠로쉽 과정을 위한 여정에 뛰어드는 시기였다. 미국에서 레지던트 인터뷰를 고작 서너군데밖에 보지 못했던 (당시 군복무 중이었기에 휴가가 없었으므로) 아쉬움을 달래기위해 남편은 미국 전역에 지원서를 뿌리기 시작했다.


미국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깊고 깊은 내륙부터 국경지대까지. 미국 50개주 가운데 무려 30개 주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꿈과 현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다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