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간질이는 그 방의 향기와 촉감은 그대로인데

7. 할머니의 방

by 밤호수

2005년 5월의 어느 날.
수업을 하고 나온 나에게 집에서 걸려온 전화.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었다.


그 날 오후.
나는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할머니를 뵙지 못한 지 어느덧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고, 대화를 나누지 못한 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치매로 인해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보내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죄송한 마음과 그리움이 합쳐져 마음이 착잡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5월의 풍경을 바라보며 어느샌가 나는 십여년 전 그 집으로, 그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댓돌에 신발을 벗고 복도를 지나 창호지가 발린 문을 양쪽으로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찰리의 초콜렛 공장'을 바라보는 찰리의 마음이 그랬을까.

어린 나에게 마냥 신기하고 따뜻하고 안온했던 그 방.


그 집.

ㄷ자형 기와집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옆에 할머니의 방이 있었다.

어린 나의 엉덩이 근처까지 오는 높은 마룻바닥을 올라가기 위해 댓돌에 예쁘게 신발을 올려놓고 그보다 한걸음 더 올라가면 높은 문지방.

나는 그 문지방조차 좋아했다.
집에서 항상 가장 작았기에 문지방 위에 올라가면 깡총하니 키가 커지는 느낌이 좋았고, 심심할 때에도 그 위에 올라가면 부엌이나 집안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서 좋아했다.


그래서 수도 없이 들었던 그 소리.

문지방에 올라가면 복 달아난다!
할머니의 싫지 않은 잔소리.

할머니의 방문 문살에는 ‘ㄱ'부터 ‘ㅎ'까지 다 그려진 무늬가 있었다.
나는 누워서 그 문풍지에 그려진 한글 조각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의 방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말이다.

늘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던 할머니의 방은, 온통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 뿐이었다.
언제나 한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할머니 그대로 방은 언제나 깨끗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가리켜 '물도 씻어먹는 양반'이라고들 하셨단다.

그런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바로 앞에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내가 아기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었다.


아랫목에는 두툼한 보료가 깔려있어 그 위에 목베개를 베고 뒹굴대며 누워있거나 할머니와 연속극을 보기도 했다. 방을 둘러서 있던 자개경대. 그 서랍들 속에는 할머니의 바느질 도구와 재미난 것들이 가득했다. 큰언니는 매일 서랍을 뒤지다가 혼이 나곤 했다.

달력에는 언제나 예수님 그림이 있었는데, 바다에 빠진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고 계신 예수님 그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 방의 정겹고 깔끔한 느낌과 예수님 그림은 어쩐지 닮아 있었달까.

그 방은 온통 할머니 냄새로 가득했다.

깔끔했던 할머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던 정갈한 방. 그리고 너무도 따뜻했던 방.


하일라이트는 아랫목 뒤에 있는 벽장이었는데 우리의 술래잡기 단골 비밀장소이기도 했던 그 벽장.

깨끗하고 도톰한 이불이 쌓여 있고 한쪽에는 우리에게 주시려고 보관해두신 먹을 것들이 있었다. 떡. 호박엿. 가끔은 쵸코렛이나 과자들. 학교에서 다녀와서 할머니에게 달려가면 그 안에서 하나씩 간식을 꺼내주시곤 하던 기억.
겨울이면 작은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거기에 벽장에서 꺼내 오신 가래떡을 하나씩 구워 참기름과 함께 주셨는데 그맛은 또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또 하나의 신비한 장소가 있었는데, 할머니 방의 구석 문을 열면 새로운 ‘골방'이 나타났다.
커다랗고 높은 까만색 자개옷장이 꽉 채워져 있던 골방.
따끈한 할머니 방과 달리 골방만 들어가면 바닥은 차갑고 왠지 모르게 무서워서 혼자 들어가기도 무서웠던 곳.
그 방은 항상 어두웠고, 다림질로 빳빳하게 한 할머니의 한복이나 천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 안에 수의까지 보관해 두셨다고 후에 엄마에게 들었다. 또한, 다듬이돌에, 잔칫날 쓰는 사람 키만한 도마까지... 할머니 방은 온갖 신비한 초콜렛 공장이었다.

엄마가 선생님이시라 어린시절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나는, 할머니가 엄마와 같았다. 유치원 행사 때마다 할머니가 오셨고, 생일이면 왕관을 쓰고 색종이 목걸이를 걸고 찍은 사진도 늘 할머니와 함께였다.
할머니가 해 주 시던 그 정갈하고 고소하던 음식들! 한옥집에서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의 시간들! 세수를 시켜주시던 할머니의 억센 손아귀와 사고칠 때마다 나를 업고 뛰시던 그 자그마한 몸......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왔고, 어린 시절 이후 나는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고향으로 가는 버스의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 속에 함께 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평안하고, 잠이 솔솔 오던 그 방과 함께.

영화 '코코'에서 나온 것처럼,

나는 우리가 이미 죽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있음을 믿는다.


지금도 나는.
종종 꿈 속에서 어린 한옥의 소녀가 된다.
커다란 청동의 손잡이를 잡고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가 제일 먼저 할머니 방으로 기어 올라간다. 다시 자그마해진 통통한 두 다리로 할머니의 따스한 냄새가 가득한 그 방문을 연다.

그곳에서는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며 아랫목에 숨겨놓으신 맛있는 떡과 옥수수를 꺼내어 주신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좋아하시던 소녀의 손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신다.

우리 예쁜 막내구나.
할아버지를 닮아서 손톱이 예쁘기도 하지.

소녀의 코끝을 그 방의 향기와 촉감이 간지럽게 어루만진다.


* 이 이야기는 <안녕, 나의 한옥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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