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업 4주차
좋다.
익어가다.
쓸모있다.
유쾌하다.
밀랑꼬니아하다.
느리다.
꾸준하다.
이상하다.
흥미롭다.
고맙다.
감사하다.
반짝이다.
지난 주 우리 에세이 수업의 글쓰기 주제는 '형용사'였다. 예시로 내어 준 작가들의 에세이에서 나온 형용사들은 '괜찮아. 기쁨. 서럽다. 서글프다. 슬프다. 아름답다'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의 삶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형용사들을, 혹은 떠올리고 싶은 형용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들이 각기 내어놓은 형용사들은 다양했고 기상천외하기도 했다. 밀랑꼴리아한 글이라니니, 치통이 '쓸모있다'니,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니. 무릎을 탁 치고 아하! 하기도 하고 깔깔깔대며 박장대소 하기도 한다. 과제를 내 주는 사람은 마치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누구나 가슴 속에 형용사 열 개쯤은 품고 살잖아요?' '맘 먹으면 막 쓸 수 있잖아요? 형용사 이야기 정도는?' 하는 듯이 내주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일단 한숨 푹 쉬며 '아휴... 형용사라니. 대체 뭘 써야 하지?'라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마치 '아 형용사? 기다리고 있었지~' 하듯이 마구마구 품고 있던 형용사 여기 한 개. 그리고 한 개 더 하듯이 쓱 꺼내놓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과제로 내준 사람이 '이렇게 쉽게 해내다니~' 한번 뻘쭘해 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상하다. 흥미롭다>
꽃보다 마흔. 님의 형용사는 이 문장에서 나왔다 <인간은 oo하고, 인생은 oo하다.> 언젠가 시쓰기 수업에서 나왔다는 이 문장은 그녀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있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책을 쓰신 '신형철'님의 말씀하셨다는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를 두고두고 음미하며 인간과 인생을 정의내리기 위해 애쓴 꽃마흔님.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의내려본 그녀.
<나는 이상하고 나는 흥미롭다> 낯설긴 하지만, 말 되는 문장이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이상하지만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내 인생은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고. 그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녀의 삶을 엿보며(?) 느낀다. 그녀는 이상하고 그녀는 흥미롭다. 그녀의 인생은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형용사는 아니지만 나도 하나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녀는 쓰고, 그녀는 찬란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자신의 인생이 놀랍고 어리둥절하다는 꽃마흔님. 날마다 글을 쓰고, 그 안에서 49년 인생을 다시 하나하나 재탄생시키고 있는 그녀의 인생은 이미 찬란하다. 찬란하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표현하기 시작하는 자. 내 안에 있는 나를 꺼내기 시작하는 자. 이미 충분히 넘치도록 찬란하다. 그리고 더욱 찬란해질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익어가다. 좋다>
빨강머리 앤줌마님.
'익어가다'는 형용사일까 동사일까. 일단 그것이 궁금해진다. '익어가고 있는 중'의 현재진행의 동작에 초점을 맞춘다면 동사일 것이나, '익어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면 형용사일 것이다. 사전에 어찌 나와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앤줌마님의 '익어가는'은 가장 아름다운 형용사이자 동사이다.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익어가고 있는 상태이자, 또 열심히 하루하루 제대로 '익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하루 '인생의 봄'을 만났음을 감사해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그녀의 오늘의 삶은 참으로 '익어가서' '좋은' 하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주, 또다른 글쓰기 과제 앤줌마님의 인생글 중에서 다섯 번째는 '딸'이었다. 그 글에서 나는 그녀의 지난 시간의 고달픔을 애달프도록 바라보았다. 그 날의 고단함과 오늘의 '익어감' '좋다'는 반대선상에 있을까, 혹은 연장선상에 있는 걸까. 아마도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날에 고달팠기에, 그날에 서럽고 애달팠기에, 그녀는 황금빛 곡식처럼 오늘날 '익어갈' 수 있으며, 자신의 인생이 더욱 ‘좋을’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아팠던 그녀는 오늘 치유된다. 어제 무거웠던 그녀는 오늘 내려놓는다. 그러나 어제도 감사했던 그녀는 오늘도 좋다. 오늘도 감사한다. 그녀의 문장에서 그녀의 인생에 대한 태도가 녹지근히 녹아난다.
<쓸모있다. 쓸모없다>
과제를 내준 다음날. 가장 빨리 글을 올리신 분은 참꽃마리님이시다. 이분은 마음 속에 형용사 몇 개쯤 달고 다니셨나보다. 그러니 이렇듯 과자 하나 꺼내먹듯 금세 내놓으시는구나. 알고보니 오래전 쓰다만 글이 이 과제에 제격이라 얼른 완성하여 보내셨다 한다. 제목 한번 기가 막히다. '쓸모있는 통증'이라나. 세상에 쓸모있는 통증도 있나. 엄살이라면 둘째가라 서러울 나는 제목에 일단 반기를 들고 나선다. 아. 일단 통증은 싫어. 하지만 이야기나 들어보자. 하는 심산으로 글을 읽는다. 시작. 그것도 '지독한 통증'이라며 시작이다. 치통이다. 그래 통증 중에 제일 지독한 게 치통이라지. 오죽하면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 필요하다면 바로 '치과의사'라며 울부짖었을까. 지독한 외로움도 빈 공 하나로 만든 '윌슬'과 함께 달래며 살아온 그가 치통 앞에서는 그토록 처절하게 무너졌으니 말이다.
역시 참꽃마리님도 이 지독한 치통 앞에서 무너져 내려 참을성의 점수가 '0'에 도달했다 한다. 마이너스가 아니길 다행이다. 그렇게 치과예약을 하고 어금니를 빼낸 속시원한 과정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휴우 내쉬었다. 비록 그 자리에 피가 계속되지만 치통보다야 덜 할테니.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그녀의 발치 후 상황에 그녀는 홀로 많은 말을 하고 세상 최고의 식도락가가 되어 먹고 싶은 것들을 끝없이 상상해 낸다 했다. 아. 아직 왜 이 고통스러운 치통이 '쓸모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쓸모 없는 충치가 빠져나간 자리. 그곳에 '쓸모있는 새살'이 채워졌다. 이제야 알겠다. 새살이 돋고 그곳에 새로운 어금니를 심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쓸모있는 통증'이 동반되었구나. 문득 미소가 번진다. 우리네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쓸모있는 통증'을 우리가 견뎌 왔던가.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우리 큰아들과,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려 예민하기 그지없는 둘째 딸아이를 생각하며 그들의 이 사춘기의 아름답고도 아픈 시절이 그들의 인생에 '쓸모있는' 혹은, '쓸모없어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간이 되기를 문득 기도하게 된다. 치통과 사춘기라니. 이 또한 '쓸모있는' 의식의 흐름이려나.
<유쾌하다. 밀랑꼬니아아하다.>
도대체, 감이 올까? 이 두 개의 단어를 두고 블루베티님. 이 무슨 글을 썼는지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점성술가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단어다. 밀랑꼬니아라니. 멜랑꼬리는 알아도 이런 단어는 당체 보도 듣도 못했다. "이거는 블루베티님 글 느낌이 아닌데?"라는 블로그 이웃님의 말로 시작하는 글은 그녀 특유의 유쾌함으로 이미 가득하다. 그래서 '유쾌하다'인가? 이웃님과의 댓글에서 블루베티님은 자신의 글에도 '담즙 가득한 밀랑꼬니아'가 끈적하게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불안과 우울이 묻어있는 책'을 선호하고, 기본적으로 '비뚤어졌다'고, 그러나 반골이 되기엔 '너무 보수적'이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그녀. 자신의 체액에 무거운 담즙이 어딘가 녹아있으나 어디인지 모르니 그것만 따로 건져낼 수는 없다고.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체액은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중에 흑담즙이 과도하면 우울하고 섬세하다. 밀랑꼬니아는 흑담즙에 해당한단다.)
'멜랑꼴리하다'면 왠지 중2병 같아서 싫지만, '밀랑꼬니아'라는 말은 그런대로 괜찮다고. 기왕 이렇게 된 것. 매력없는 밀랑꼬니아는 싫고 '유쾌한 밀랑꼬니아'가 되어보겠다는 블루베티님이다. 탁월한 선택이다. 생겨먹은 걸 어떡하나. 글은 자신을 닮아서 내가 아무리 내가 아닌 척 해보려 해도 결국은 '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글인것이다.
에세이 수업을 듣고 있는 분들이 자꾸 '나같은 글'만 쓴다고, '똑같은 글만'쓰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시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내가 아닐 수 없든, 나의 글도 내가 아닐 수가 없는 것. 다만 매력있는 내가 되도록, 나의 글도 매력있는 글.로 만들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쓴다.
유쾌한 밀랑꼬니아가 되기 위한 블루베티님의 귀여운 발악처럼. 좀 더 매력있는 나를 내 글로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끗 다른 글을 써 보려 우리는 노력한다.
<느리다.꾸준하다. 빛나다. 반짝이다>
뮤즈님.
그녀는 느리다. 그러나 그녀는 꾸준하다. 그리고 그녀는 반짝인다.
재미있지 않은가. 뮤즈님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는 '느리다.와 꾸준하다'이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선사한 '그녀를 표현하는 단어'는 '반짝이다'였다. 하나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느리지만 꾸준한, 반짝이는 뮤즈'랄까.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보며 (그녀는 베이징에 산다.) 특히 쇼트트랙, 스피드가 생명인 이 스포츠 경기를 보며 감탄하는 뮤즈님.
그녀의 글을 보며 문득 나를 생각해 본다. 나는 '빠르지만' '구멍이 많다'. 나는 '빠르지만' '잊어버리고 안한다' 나는 '빠르지만' '뒷수습이 안된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나는 정 반대에 서 있지 않은가. 그러나 블로그마을에서 우리는 찰떡궁합이 기가 막히게 맞는다. 척 하면 척. 요기 하면 저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써 내맘을 알고 글로 쓰고 있는게 그녀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함께 표현하는 형용사는 무엇이기에 '느리고' '빠른' 각 끝에 서 있는 우리가 그 어느 접점에서 그렇게 환상적으로 만났던가? 아마도 '상상하다'일 것이다. '상상'을 빼면 나는 시체다. 40대의 상상하는 소녀가 되고 싶은 중년여인. 그런 나의 모습을 그녀 안에서 만났으니, 상상하는 우리는 '빛날'것이요. '반짝일'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그녀의 반짝임은 나보다 일곱 배 정도는 더 twinkling했으니 아마도 지금껏 그녀의 글에서 내가 느껴온 솔직함과 애정. 예술과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반짝이는 라인강변'과 '도시'에 대한 꿈이 결합된 반짝임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늘도 빛난다. 오늘도 반짝인다. 그녀 스스로 말한 '나를 추억하며 반짝이'고, '오늘도 '나는 또 반짝였다'처럼. 반짝이라.
<고맙다. 감사하다>
이보다 더 평범하고, 이보다 더 진실된 단어가 있을까. 너무 평범한 단어라 글로 쓰기도 망설여지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분께는 찰떡같다. 글을 쓰는게 부담스럽고 어려워 몇 번을 망설였다는 옥수수아재. 동윤 님. 과연 '글을 올리실까' 몇 번이나 궁금했지만 차마 강요하지 못하고 근처를 배회하던 내게 선물같은 글. 이번주의 숙제 두 편을 모두 올리신 동윤 님. 그러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셨다고. 그때 아내가 들려준 '일기처럼 그냥 편하게 써라' 한마디에 용기를 내어 쓰기 시작한 형용사가 바로 '고맙다'이다. 가족들과의 저녁식사를 위해 양배추를 썰어넣고 닭갈비를 만드는 사랑스러운 아빠의 모습.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한 끼는 97년 군대에 있을 때 보초를 서다 무너졌던, 다른 것도 아니고 장교식당에서의 밥짓는 연기에 무너져 엄마의 밥 한끼를 그리워하며 펑펑 울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에게 '밥 한끼'는 그런 의미지. 지금 내 눈앞의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한 공기보다 더 고맙고 감사한게 있을까. 와이프를 위해 '설거지는 꼭 내가 하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치는 동윤님의 글은 그 어느 화려한 글보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진심어린 글이다. 그런 의미로 앞으로 설거지는 꼭 동윤님이 하시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나도 나의 형용사를 내놓아야 할 차례이다.
오늘의 나의 형용사는 단연코 '즐겁다'와 '즐기다'이다.
이들의 글을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순간이 '즐겁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즐긴다'.
글이란 건. 이러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나만 위해 쓰는 글은 일기이지만, 에세이는 독자가 있는 글.이라고 우리 수업시간에 주구장창 나누지 않았던가? 이들의 글은 남보고 '읽어달라는'글이다. '독자를 위한'글이며, 독자가 존재할 때 '온전해지는'글이다.
나는 그들의 글의 '온전한' 독자이다. VIP 1열 11석 (나름대로의 1열 중앙)에 앉아서 가장 편안하고 가장 고요한 상태로, 마음과 귀를 열고 들여다보는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즐.겁.다.' 이 순간을 나는 진정으로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