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 1.
‘안녕 나의 한옥집’ 출간 이후 한국에서의 여러 북토크가 있었다. 그 중 하나에 참석했던 나의 친구 T. 중학교 시절부터 나의 친구이자 지금도 나의 심적 물적 최고의 지지자인 그녀. 그런 그녀가 한 북토크에 참석했다. 혜화동 고즈넉한 한옥의 밤에, 다른 두 작가님과 함께 한 '한옥'을 주제로 한 북토크였다. 근사한 밤이었다. 북토크에 웬만하면 가까운 지인들의 참석을 말렸던 내가 그 날은 그녀를 초대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될 것 같아 나도 마음이 편안했던 까닭이다. 그 다음날 만난 그녀가 말했다.
나도 책을 써야겠어
갑자기 왜?
널 보니까 너무 멋있어 보이더라
물론 늘 커리어에 관심이 많이 유튜브와 책 출간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이긴 했지만, 그날은 좀 더 심각했다. 내가 꽤 멋있어 보이긴 했나보다. (사실 ‘멋있어 보인다’는 것은 분명 책을 출간하면 좋은 점 중 하나이긴 하다. )
영어공부하는 책 쓰면 되잖아.
참고로 그녀는 영어교사이고, 고3담임이다. 그런 그녀가 책을 쓴다면 당연 영어공부에 관한 책을 쓰려니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입시에 대한 책을 쓰거나.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그런 책은 재미없어
그럼 뭘 쓸 건데?
몰라.
그게 답이었다. ‘몰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요. 책을 내고 싶어요’ 블로그 이웃들도, 나의 에세이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도 많이 하던 말이었다. 무엇을 쓰고 싶느냐 하면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 특별한 게 없어서, 컨텐츠가 없어서 쓸 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T와 나는 카페에 마주앉아 이야기했다.
자. 잘 생각해 봐. 네가 가진 컨텐츠가 무엇인지. 너만이 가진 것, 가장 너다운게 뭔지 잘 생각해 봐.
이 얘기도 많이 듣던, 아니 많이 하기도 했던 말이다. 모두가 말하는 책쓰기 비법. 너만의 컨텐츠를 찾아라!
나도 에세이 학생들에게 늘 말한다. 너만이 가진 컨텐츠를 찾아라. 모두가 가진 것이라도 너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아라.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30년지기 친구는 시니컬하게 내뱉는다.
모르겠어. 그런게 어딨어. 내인생 니가 뻔히 다 알잖아. 남이 관심가질 거라곤 1도 없다. 그치만 영어교사 입시 이런건 너무 따분해. 학교생활도 별로 할 얘기가 없어. 쓰고 싶지도 않고.
그것도 사실이다. 영어교사임을 강조하기엔 좀 따분하긴 하다. 전문적인 이야기를 쓸 게 아니라면. 영어교사를 드러내면서 전문적인 책을 쓸 게 아니라면, 에세이를 쓸 거라면, 그녀만의 ‘특별함’을 강조한 교사생활이어야 할 것이었다.
그럼 직업 말고, 어린시절부터 주욱 생각해봐. 너만의 키워드.
계속해서 수업시간에 하는 말을 반복해 보지만 여간해서 그녀에게 뭔가 나올 것 같지 않다. 머리를 쥐어뜯는 T. 자신만의 키워드 따윈 없다는 것이 그녀의 항변이다.
그럼 도대체 왜 책이 쓰고 싶은 건데?
멋있어 보이잖아. 있어 보여. 나도 하고 싶어.
너답다.
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퍼뜩 떠올랐다.
그래. 그거다. '있어 보여!' 라는 말. 그녀의 인생의 키워드는 바로 그거였어 .
'있어 보여!'
다행인 것은, 내가 그녀의 인생을 최소 70퍼센트를 같이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키워드. 나도 조금은 안다.
T와 함께 떠오르는 그녀 인생의 키워드.
그건 바로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펜을 들고 목록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굿모닝팝스.
뉴키즈 온더 블락.
팝송 레코드.
마이 걸 (ost와 함께)
보디가드 (당연히 ost와 함께)
케빈 코스트너
유콜잇 러브. (소피마르소 주연의 영화)
사랑은 은반 위에 (피겨 스케이팅이 나오는 영화)
얼리 어답터(D어쩌고 하는 카메라. 각종 음악듣는 기기)
아일러브스쿨 최초사용자(라고 믿음)
싸이월드 최초 사용자(라고 역시 믿음)
프렌즈
파고다 어학원
책을 쓰고 싶은 마음
그리고 제일 위에 적었다.
'있어 보이는 것들'
적다보니 재미있었다. 자기 인생의 이야기 따위는 없다던 그녀 역시 어느새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고 있었다.
<야 내가 무슨~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해.> 하면서도 <그때 니 방에~ 그때 니가~ 그때 우리가~> 로 시작되는 수많은 기억들을. 이야기는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나는 또 공통점을 적기 시작했다.
그녀는 늘 유행에 ‘빨랐다’.
그녀는 영어, 특히 ‘미국’을 좋아했다.
그녀는 늘 ‘있어 보이는 것’을 지향했다.
외국에 사시는 이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미국 문화에 익숙했고, 영어를 가까이 했다. 그 옛날 이미 굿모닝팝스를 듣고, 이미 교재를 쫙 방에 진열해 놓았으며 (나는 그때 그녀 덕분에 그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들이 뉴키즈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 이미 미국에서 공수한 비디오 테이프와 브로마이드를 지니고 있어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녀 덕에 뮤직비디오라는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김연아가 등장하지도 않았던 30년 전 이미 '사랑은 은반위에'라는 피겨 영화를 보고 피겨스케이팅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그때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종목이 있다는 것을 그녀덕에 처음 알았다~!) 그녀가 하는 것은 늘 신기해 보였고, 뭔가 ‘있어 보였’다! 미국병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그런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정작 미국에는 그녀가 아닌 내가 살고 있지만 말이다.
위에 쓴 공통점들은 그녀의 키워드가 되었다.
유행에 민감하고, 영어를 좋아했고, 선진문화를 먼저 받아들이고, ‘있어 보이는 것’들을 동경하는 그녀.
순식간에 가제가 나왔다.
<’있어 보이는 것들’을 향하여> 라고.
그녀 인생의 모토는 아무래도 남들보다 ‘있어 보이는 것’들로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속칭 ‘간지난다’라고 해야 하나? <간지나는 것들을 향하여>는 너무 없어 보이니까 ‘있어보이는 것들’로 하자. 가제 하나에도 있어 보이는 건 중요하니까.
하다보니 대강의 목차도 나온다.
뉴키즈를 동경하던 사춘기 소녀시절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 그리고 보디가드
파고다 어학원과 함께 한 대학시절
아일러브스쿨과 싸이월드시절
영어교사는 나의 운명
책 한번 써보자
영어교사 컨텐츠는 재미가 없다며 안 쓰겠다던 그녀의 마무리는 결국 ‘영어교사’의 운명으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풀려나간다면 그 또한 ‘재미없다’고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재미있어 보인다.) 이제 수도 없이 바뀌어나갈 목차이지만 대충 설계도를 완성한 셈이다.
글을 쓰고 안 쓰고는 그녀의 몫이다. 내가 써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 글은 그녀의 몫이니 맡겨두기로 한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난 할 말이 많다. 그녀의 ‘있어보임’에 대한 오랜 갈망에 대하여. 문제는 이제 그녀가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얼마나 오랫동안 들고 있을 것이냐일 뿐이다. (타자를 치겠지만 ‘펜을 들고 있는다’는 표현이 좀더 있어 보인다. 그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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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앞으로 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를 써가는 법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