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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생각 Feb 03. 2020

차마 버릴 수 없는 니트의 쓸모

길고양이의 겨울나기

 나는 니트 소재의 옷을 좋아한다. 나에게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포근하면서 편하기 때문에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니트 옷을 입는다. (심지어 나는 여름용 민소매 니트도 두어 개 가지고 있다.)


 저마다의 색깔과 독특한 짜임새를 가진 니트를 모두 차별 없이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손이 자주 가는 니트는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중 하나인 오렌지색 니트를 고데기가 망쳤다는 거다. 아니 정확히는 실수로 고데기를 켜 둔 내가 망쳤다. 고데기가 켜진 줄도 모르고 그 위에 던져뒀던 오렌지색 니트에는 하필 너무 잘 보이는 팔 부분에 고데기 흔적이 남아서 입으려야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누가 봐도 태운 흔적이 선명한 옷을 입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망설이고 있을 때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가 생각났다. 거처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맞은편 건물 앞의 양지바른 곳에 앉아있길 좋아하는 뚱뚱한 고양이였다. 아무리 해가 따뜻하다곤 해도 겨울이었고 그 고양이의 체온이 걱정되던 즈음 니트가 망가진 것이다. 동물에 대한 상식이 거의 전무한 나지만, 어디서 주워 들었던 희미한 정보에 의하면 이런 니트 정도도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니트를 손에 꼭 쥐고 집을 나갔을 때 역시나 고양이는 예의 그 양지바른 곳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경계하며 슬쩍 자리를 피한 고양이는 내가 오렌지색 니트를 슬그머니 놔두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내가 물러나자 그 니트를 툭툭 건들며 잠시 관심을 보였다가…

… 이내 무시하곤 니트가 놓은 옆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모든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던 나는 은근한 서운함을 느꼈지만 ‘아직 낮이라 그렇겠지, 밤에 추워지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추운 밤이 지나고 다시 해가 떴을 때 나는 얼른 집 밖으로 나섰다. 오렌지색 니트가 고양이에게 조금이라도 온기를 줬길 바랐다. 그러니까 그 니트에 고양이 털이 한 가닥이라도 묻어 있다면, 그 친구가 추운 겨울에 조금이라도 포근할 수 있다면.


 그런데 오렌지색 니트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온데간데없었다. 건물의 주인이 쓰레기라 여겨 버린 걸까? 내가 고양이를 위한 물건임을 알리는 표지라도 만들어둬야 했나? 아니면 고양이를 위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게 싫은 누군가가 버렸나?

 아끼던 오렌지색 니트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내가 입지도, 그렇다고 고양이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고양이는 지금 괜찮은 걸까?

 걱정과 다르게 고양이는 그해 겨울을 잘 견뎠고 나는 겨울이 끝나갈 즈음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새 동네에서 새로운 계절을 지나 어느덧 겨울은 다시 다가오고 있다. 분명 옷은 있지만 입을 옷은 없는 미스터리 한 상황이 또 벌어져 역시 니트를 사야 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문득 그 고양이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맞은편 건물 양지바른 곳에 앉아있길 좋아하던 뚱뚱한 길고양이.


 그 고양이가 올 겨울도 부디 무사히 보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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