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승진이 하고 싶었다. 올해 초, 임기 5년 만료를 앞두고 내심 그런 욕심을 가졌다.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성과도 있어. 가능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참 순진했다. 공무원 조직은 법과 제도로 움직이는 곳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난 그 빈틈 어딘가를 찾으면 사람들이 오래도록 전설처럼 이야기할 '선례'라는 것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수많은 '어공'들의 잔다르크가 되어 우리만이 느끼는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고, 더 연속적인 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그렇다. '어공'은 제도상 승진이 불가능하다. 5년이 되면 얄짤없다. 또다시 채용 시장에 내던져져 다른 경쟁자와 동등하게 같은 채용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난 그게 정말 억울했다. '공직에 필요한 전문직의 능력'이라는 목적만이 있을 뿐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수개월 동안 나 혼자 이런저런 법들을 갖다 대고, 5년 간 성과를 정리해 내밀어도 통하지 않았다. 승진은커녕, 임기 만료 전까지 더 많은 일을 하며 한 달에 걸친 채용과정을 정신없이 치러야 했다.
다행히 다시 채용이 결정되었고,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 같은 업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월급만은 똑같지 않았다. 40만 원가량이나 줄어들었다. 이전의 경력이 연결되지 않고, 말 그대로 나는 새로 채용된 '신입'이기 때문이다.
막상 수십만 원이 줄어든 월급통장을 마주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억울했던 마음은 커지고 커져 나를 잠식했고, 사무실의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고 다 보아 온 그들이지만 누구 하나 내게 선뜻 작은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는 그 모습이 상처가 되었다.
그렇게 자발적 거리 두기를 하며 2~3개월을 보냈다.
점점 지쳐가는 건 나였다.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는 이 허무함과 억울함, 외로움 같은 어두움을 떨쳐낼 수 없어 힘들었다.
그때 언니의 추천으로 <마음 지구력>을 만났다.
이 책은 정신의학과 의사 윤홍균 작가의 2024년 신작이다. 곳곳에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실패를 반복해 오던 사람들이 어떻게 회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서문에서 작가는 '글이 다소 투박하고 무료하더라고 잘 읽어주길 바란다'라고 했지만, 이 공간을 빌려 말씀드리고 싶다. '괜한 걱정이셨습니다"라고.
2일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말들로, 마치 옆에서 말해주듯이 편안하게 서술되어 내겐 더 큰 위안이 되었다. 정말 감사드린다.
책은 지구력, 공감능력, 적응력을 회복을 위한 3가지 요소로 꼽는다. 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작가 개인의 경험, 다양한 예시와 함께 제시되고 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좀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작가의 태도였다. 전문가라고 지식만을 뽐내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건 이 책으로 위로를 얻고자 하는 독자의 치유를 진정으로 응원하는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얻은 것은,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용기, 그리고 내 현재 마음 상태를 객관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억울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소진'되었던 사실을. 그래서 실패에 대응할 방어력을 잃고 한 없이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려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모든 구절에서 나를 비추어 보게 됐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나의 실제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됐다.
수개월 동안 '나는 임기제공무원이라는 제도의 피해자'라며 스스로를 깊은 상처에 옭아맸다. 그 상처 때문에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전투력을 잃었으니 회복할 힘도 없다고 주문을 걸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그냥... 지쳤던 거다. 그냥 ‘그랬구나'했으면 더 쉽게 풀릴 일이었다. "짱니야, 너 힘들구나. 그렇구나"라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면...지난 수개월을 그토록 어두운 마음에 사로잡혀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때도 자신에게 "그랬구나"를 많이 해주자.(중략)
그렇게 감정 문제에 공감해 주는 게 자기 방어의 핵심 능력이다.
- <마음 지구력> 160쪽
내 딸에게나 해 오던 마법의 말, "그랬구나"의 힘은...어른인 내게도 치유력이 컸다.
작가는 또 '노력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다'며 나를 위로했다. 마음 지구력을 기르는 노력도, 내가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쌓아 온 노력도 다 결과를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생각한 때'에 '내가 생각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 더 큰 상실감이 있었다. ''늘공'은 특별한 노력을 안 해도 월급이 오르는데, 왜 '어공'은 재임용받았다고 월급이 수십만 원이나 깎여야 하는 거야!" 라며 기회만 되면 문제를 제기하고 다녔다. 그렇게 나의 분노는 쌓이고 쌓여, 급기야 내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내게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직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노력과 결과의 시간차'를 인지하자, 신기하게도 내 분노는 진정되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불평만 쏟아내기보다는 이제 그만 감정을 추스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력한 결과가 바로 나타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노력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다.
- <마음 지구력> 64쪽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크고 작은 일들로 감정의 방향을 잃어버린다. 분명 아침 출근길에는 '오늘은 온화하고, 여유롭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하루를 보내야지"라고 다짐했는데, 어느샌가 울그락불그락 오르락내리락 감정의 파도를 타고 있는 나를 본다. 또 때로는 내가 방향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흘러가는 부정적인 감정에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낸다. 지금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내 모습이 마냥 두렵지는 않다. 그런 모습까지 똑바로 볼 용기가 생겼고,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어두운 감정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길은, 잃어버리면 재탐색하면 된다. 조급한 마음만 버리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누군가 나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어둠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면 이 책을 펼쳐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책 한 권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