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인사업자 장감독 Feb 07. 2022

'지금 우리 학교는',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던 이유

K-넷플릭스의 불지옥 한반도는 언제까지 갈까?

오징어게임, 지옥을 잇는 K-넷플릭스의 대표작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미국 넷플릭스 1위를 먹어버렸다. 이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흥행을 담보하는 카드로 자리 잡고 있다.


개인적으로 좀비물 장르를 재밌게 보는 편이고, 학교가 배경인 것도 신선해서 주저하지 않고 도전했다. 하지만 3화까지 보고 나서,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보는 내내 불쾌한 감정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불쾌했는지, 왜 '지금 우리 학교는'이 웰메이드 콘텐츠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3화까지만 봤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1. 학교폭력을 다루는 방식


드라마에서 좀비 사태가 일어나는 원인은 비슷한 장르물에서 많이 쓰이는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를 만든 건 과학교사 병찬. 그는 아들이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되고, 신고를 하고 학폭위 절차를 밟지만 교장에 의해 유야무야 넘어가고 전학을 간 아들이 또다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고양이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쥐가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을 때 공격적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테스토스테론'을 추출한 그는, 자신의 아들이 더 이상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반격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주사를 놓는다. 하지만 아들은 좀비와 같은 괴물이 되어버리고, 본인의 어머니까지 전염을 시킨다.


개인적으로 바이러스를 만든 동기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드라마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는 바이러스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과학교사의 아들은 바이러스를 맞지만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에게 맞섰지만 겁만 주고는 옥상에서 추락해버렸고, 병원에서는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다. 학교폭력을 당한 희생자이지만, 바이러스의 존재를 보여주는 장치로만 소모되고 아버지의 동기로만 설명될 뿐 다른 의미는 없는 캐릭터인 것이다. 



여기서 더 불쾌했던 것은, 학교폭력을 묘사하는 수준은 또 매우 디테일하다는 점이다. 초반에 궁지에 몰려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심정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에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책으로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올 때 '이게 맞나?' 싶었다. 극의 진행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적 선도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라스트 오브 어스2에서 엘리와 애비라는 캐릭터의 대립을 위해, 전작 주인공인 조엘을 골프채로 후려치는 장면을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현존하는 사회문제는 극을 위한 땔깜일 뿐이고, 캐릭터에 대한 존중이 없다. 이것은 캐릭터를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문제와도 이어진다.


2. 불필요한 캐릭터 소모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상당히 많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는 상당히 많은 캐릭터가 '죽는다'로 연결된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거기에 서사를 부여하다 보면 극은 난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좀비 장르물에서는 필연적으로 많은 캐릭터의 죽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캐릭터의 죽음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을 때 발생한다.


앞서 얘기했듯 최초로 좀비가 된 과학 고사의 아들은 정말 무의미하게 죽었다. 그리고 극이 진행되면서, 빡침을 유발하는 이들도 죽고 주인공 편에서 힘이 되어주는 캐릭터들도 죽어나간다. 그런데 이 과정이 엄청 소모적이다.


가장 경악했던 장면은 나연과 경수의 대립이 극대화되는 시점이었다. 분양아파트에 사는 나연과 임대아파트에 사는 경수는 서로를 혐오하는 관계다. 나연은 경수를 '기생수', 즉 기초생활수급자를 줄인 혐오표현으로 부른다. 그런 나연에겐 누구도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자신보다 하찮은 경수에게 편을 들어주는 상황이 싫었던 나연은, 결국 경수의 상처에 감염자의 피를 묻혀 감염되게 만드는 최악의 일을 저지른다. 그렇게 경수는 나연에게 기생수라고 무시만 당하고 친구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다가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그 사실이 들킨 나연은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자 스스로 고립되는 선택을 한다. 여기서도 어이가 없었던 포인트는, 가해자인 나연에게 쓸데없는 '서사'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뚤어졌다는 것. 이런 나연을 선생님인 선화가 끝까지 쫓아가서 친구들에게 돌아가라고, 도와주라고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생님이 희생을 당한다. 


이게 정말 짜증이 났다. 결국 나연의 자기반성이라는 서사를 위해, 경수와 선화라는 두 명의 캐릭터를 소모했다.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나연이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친구들에게 돌아가려 할 때, 귀남이 나타나 나연을 잡아먹는다(3화 이후의 내용은 유튜브에서 요약본으로 확인). 이게 무슨? 결국 나연의 반성과 캐릭터의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수와 선화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미국의 대표 좀비 드라마인 워킹데드를 시즌2까지 정말 재밌게 봤는데, 그 이유는 캐릭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납득할만한 서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좌의 게임 역시 시즌 1에서 중요 캐릭터가 사망하지만, 충격적인 것과 별개로 그 캐릭터가 사망하는 이유가 있고, 그것을 기점으로 뒤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 하지만 '지우학'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그저 좀비 사태로 인해 변해버린 지옥도, 그 속에서 펼쳐진 지옥 같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기능한다. 어떠한 의미 있는 서사를 찾을 수 없는 학살극일 뿐. 그래서 불쾌했다.


3. 왜 얘가 빌런이야?


극이 진행되면서 좀비에 물려도 지능은 그대로 갖고 있고 힘만 세지는, 이른바 '무증상자'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빌런이 되는데, 그중 주인공을 가장 악랄하게 쫓아오는 빌런은 바로 '귀남'이다. 


귀남은 학교폭력을 일삼는 일진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인물에서, 남자 주인공 '청산'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시무시한 살인 행각을 벌인다. 


그런데 귀남이 빌런이 되어 상당한 파워를 갖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학교사의 아들은 결국 아무것도 못해보고 죽었는데, 좀비 사태 이전에도 기생충처럼 일진에게 붙어 폭력을 일삼던 놈이 바이러스 덕분에 살인을 무차별적으로 저지르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참.... 불편했다.


귀남 패거리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여학생(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도 무증상자가 되는데, 이는 귀남과 대립되는 존재로 설정을 해두고, 당하기만 하던 입장에서 반대로 힘을 가지게 된 입장으로 그려낸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했던 이들에게 별다른 복수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진 대장은 귀남에게 살해당했다. 여학생은 막판에 실험체로 쓰였다. 빌런의 무게감에도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귀남의 분량만 쓸데없이 늘렸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불편했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봤다. 사실 '지우학'이 장르물로는 퀄리티가 낮다고 할 순 없다. 좀비들로 변해버린 지옥도를 꽤나 잘 표현했고, 청산이나 수혁, 온조 같은 주인공 캐릭터들의 연기도 꽤나 좋았다. 


하지만 오징어게임부터 이어진 지옥 불반도 콘텐츠에 내가 지쳤던 것은 아닐까?

이제 기생충, 오징어게임이 한국을 대표하는 IP지만 그것이 무조건 자랑스럽진 않다. 


한국사회 속의 지옥을 관찰하고 묘사해낸 결과물이 전 세계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