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버닝맨은 [코로나: Endgame]일까?
나날이 전 세계의 페스티벌 취소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일찍이 3월에 울트라 마이애미, SXSW, 글라스톤베리가 취소되었다. 코첼라와 EDC Las Vegas는 하반기로 연기, 현재의 미국 상황을 볼 때 하반기 개최 여부도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아온 페스티벌들이 취소, 연기된 격이다. 이 페스티벌들이 얼마나 오래, 꾸준히 지속하여 왔는지만 보아도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울트라 마이애미는 1999년 첫 회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취소되었다. (민원으로 인한 시와의 마찰이나 온갖 구설수들에도 꿋꿋하게 진행해오던 울트라 마이애미였다.) SXSW 역시 34년 만의 첫 취소. 글라스톤베리는 페스티벌 역사에 남을 50주년 이벤트가 취소되었다.
당연히 이들보다 작은 페스티벌들은 줄줄이 취소 소식을 조용히 알렸다. 대형 페스티벌 중 사실상 마지막 보루였던 7월 말의 투모로우 랜드도 4월 15일, 공식적으로 취소를 알리며 무너졌다. 올해 페스티벌 씬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완벽히 당했다는 것의 방증이었다.
페스티벌들의 취소가 결정된 시점에서, 이제부터 주목해야 할 점은 각 페스티벌이 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다.
대부분의 페스티벌은 올해의 행사를 취소하고 내년을 기약했다. (투모로우랜드, 울트라 마이애미, SXSW, 글라스톤베리)
코첼라나 EDC 라스베가스는 한번 더 희망을 갖고 페스티벌을 하반기로 연기하였다. 올해 무조건 한 번의 행사는 진행하겠다는 결의가 묻어난 결정이다. 이처럼 페스티벌들이 라인업 내 아티스트들과의 협의를 통해 하반기로 혹은 내년으로 연기(사실상 올해 행사 취소)의 선택지 중 하나를 가져가고 있는 가운데,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페스티벌이 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페스티벌계의 아웃사이더. 흔히 알고 있는 페스티벌들과 방향성에서 독보적으로 다른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탄탄히 해오고 있는 페스티벌, 바로 Burning Man 버닝맨이다.
버닝맨 역시 이번 코로나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4월 10일자로 버닝맨은 올해 행사가 진행될 수 없음을 밝혔다. 35년 만에 네바다 주가 썰렁해질 예정이다. 무려 35년만. 버닝맨이 다른 페스티벌들과 사후 대처의 측면에서 어떤 식으로 그 기조를 달리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버닝맨이 어떤 페스티벌인지에 대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네바다 주에 위치한 블랙 록 사막. 매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일주일 간 이 사막에서 페스티벌이 열린다.
전 세계에서 가장 특이하고, 자유롭고, 다채로운 페스티벌, 버닝맨.
버닝맨은 다른 페스티벌들과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페스티벌 포스터에는 아티스트 라인업이나 프로그램 스케쥴이 없다. 관객 한 명 한 명이 모두 적극적인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때문. 이들은 이 곳에서 ‘Burnner 버너’라고 불린다. 버너들은 사막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더 크게는 ‘Black Rock City’라는 하나의 도시를 건설한다. 블랙 록 사막에서 행사가 열린다는 점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규제가 거의 없는 페스티벌에서 유일하게 지켜야 할 점은 [버닝맨 10 계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버닝맨 십계명>
1. 철저한 포용(Radical Inclusion)
2. 선물 주기(Gifting)
3. 탈상업화(Decommodification)
4. 근본적 자립(Radical Self-Reliance)
5. 근본적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
6. 공동체적 노력(Communal Effort)
7. 시민으로서의 책임(Civic Responsibility)
8. 흔적 안 남기기(Leaving No Trace)
9. 참여(Participation)
10. 즉각성(Immediacy)
눈이 가는 항목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4번의 근본적 자립. 버닝맨이 열리는 동안 주최 측에서 제공해주는 것은 물이 안 나오는 화장실, 의료/안전 서비스, 공공업무, 모바일, 그리고 일부 진행뿐이다.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개입만 한다. 그 외 모든 것은 버너들이 일주일 동안 자급자족하는 시스템. 타 페스티벌처럼 푸드 트럭에서 갓 구워진 고기들과 레드불이 섞인 위스키 밤을 기대했다면, 잘 못 찾아온 것. 이들을 직접 가져오지 않고는 일주일 동안 구경도 못할 것이다. 주최 측에서 강조하는 준비물은 일주일치 식량과 물, 고글 마스크, 캐멀 백, 자전거, 챙이 넓은 모자, 그리고 열린 마음이다.
여기서 열린 마음은 십계명 중 1번 철저한 포용, 2번 선물 주기, 그리고 9번 참여와 연결된다. 버닝맨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인 버너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이 안에서 하는 경험에 모든 가치를 둔다. 일주일간 블랙록 사막 내에서는 금전 대신 참여자들 간 선물이 오간다. 각자 나누고 싶은 것들을 준비해와서 나누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 바탕에는 상업화를 지양, 아니 아예 버린 버닝맨의 고집이 느껴진다. 이 곳에 오는 아티스트들도 주최 측의 섭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버닝맨에 함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는 것. 버닝맨의 시그니쳐인 각종 아트 조형물들도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다. 일주일 동안 예술적 감각을 버닝맨에 나누고픈 아티스트들이 모여 조형물들을 제작하고 표현한다. (이들에게는 주최 측이 일부 지원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페스티벌, 우리가 알던 페스티벌들과 굉장히 다르지 않나? 버닝맨의 제1가치는 참여다. 참여를 가장 밑바탕에 두고, 탈상업화를 중심에 두는 버닝맨, 흔히 일상 속에서 쉽게 내려놓기 힘든 요소들을 많이 내려놓은 만큼, 버너 커뮤니티에서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는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이 버너 커뮤니티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일상에서의 삶과 비즈니스에 접목시켜 높은 가치를 도모한 사람들이 많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테슬러의 엘론 머스크,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그들 모두 버닝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버닝맨의 하이라이트는 토요일 밤에 진행되는 ‘버닝 맨’ 행사. 이름 그대로 사람 모양의 조형물을 태우는 행사이다. 모든 버너들은 일주일 간 각자의 공동체, 빌리지에서 생활을 영위하다가 이 시간만큼은 모두 이 행사에 집중한다. 그동안 참여자들의 가치를 서로 나누었다면, 토요일 밤에는 버닝맨 주최 측이 담고자 하는 가치를 나누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버닝맨 주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진다. 사실 버닝맨 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 속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버닝맨 자체가 상업성과 반대되는 행보를 밟고 있기 때문에 버닝맨 주최 및 운영진들은 버닝맨으로부터 월급을 받으면서도 일부 투 잡, 쓰리 잡을 겸하기도 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의미 있다 보니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버닝맨으로부터 받는 월급이 높진 않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버닝맨은 기업, 지자체로부터 투자 및 후원을 일체 받지 않는다. 오로지 티켓 수익만으로 굴러간다. 이 모든 생소한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진정으로 버너 커뮤니티에 함께 하고픈 사람들만이 자원봉사자 혹은 참여자 버너로서 일주일을 함께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기에 버닝맨은 특유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버닝맨에 대한 설명은 이쯤이면 충분할 듯하다. 이 정도만으로 이미 버닝맨은 흔히 알고 있던 페스티벌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버닝맨은 코로나로 인해 행사 진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의 대처 또한 다른 페스티벌들과 완전히 달랐다.
앞서 올해의 버닝맨이 ‘취소’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진행될 수 없음을 밝혔다’고 서술하였는데, 얼핏 보면 같은 의미로 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뜻을 내포하였다. 4월 10일 자로 올라온 오피셜 공지, The Burning Man Journal에서 버닝맨 측은 올해 버닝맨 행사를 진행하는 대신 Virtual Black Rock City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즉, 올해의 버닝맨은 가상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연초 결정된 올해 버닝맨 페스티벌의 테마이다.
멀티버스라는 말은 작년과 재작년, 마블 팬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회자되었던 용어, 어벤저스 시리즈의 팬이었다면 이미 익숙할 용어이다.
멀티버스(Multiverse) : 멀티(multi)와 우주(universe)의 합성어로, 다중우주론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속해있는 우주 외에도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버닝맨 측은 가상의 멀티버스 내에서 올해의 Black Rock City를 만들어나가겠다고 이미 1월 24일에 밝혔다.
코로나 사태, 그리고 행사의 물리적 취소와 맞물려 어쩔 수 없이 결정한 바가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기 전부터 버닝맨 측은 ‘멀티버스’의 구현을 기획했고, 훨씬 이전에 이 테마를 올해의 테마로 발표하였다.
물론 멀티버스라는 용어 자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최 측도 가상세계에서만 버닝맨이 열릴 것을 기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네바다 주에서의 Black Rock City와 가상의 Black Rock City를 연결하려 했던 의도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하지만 지금 현 상황에서 버닝맨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멀티버스를 구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직 세부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4월 10일 공지에서 버닝맨은 Virtual Black Rock City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세부사항은 추후에 다시 고지하겠다고 말했으니, 페스티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정말 Virtual이 느껴질 정도로 구현이 잘되는 것인지, 아니면 온라인 스트리밍에 그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버닝맨이 밟아온 행보로 비추어볼 때, 멀티버스를 테마로 내세운 결정이 결코 가볍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 아직 발표를 안 했을 뿐 버닝맨의 큰 그림, 이름하여 <페스티벌 멀티버스>는 이미 구상이 거의 끝나 있을 수도 있다.
이제까지 34년간 상업성에 반대하고 ‘참여’라는 제 1가치를 포함해 버닝맨만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코로나 사태로 엄청난 전환점을 맞이한 지금, 물리적인 행사는 취소되었지만 버닝맨은 여전히 그들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중이다. 그리고 그 가치에 함께 동참하려는 전 세계의 수많은 버너들은 예년처럼 함께할 것이다.
전 세계 보건/의료 관계자들이 코로나 사태 전의 세계는 앞으로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 말했다. 앞으로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한 경계는 2019년까지 경험하던 정도와 차원이 달라질 것이고, 이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페스티벌 업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버닝맨이 ‘버너 커뮤니티’의 힘으로 이제까지 수많은 실리콘벨리의 리더들을 배출해냈듯, 탈상업성을 앞세워 페스티벌 문화와 정신의 지향점을 제시해왔듯, 코로나 이후의 페스티벌과 문화산업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신선한 해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