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여기 있다

by 기공메자

<작가의 생각 한 줄>

"퇴직은 역할의 끝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증명하는 다른 방식의 시작이다."


사이렌 소리와 무전기 잡음, 화재 현장의 열기와 구조 대상의 체온이 하루를 규정하던 삶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는 뒤로 밀려났고, 역할이 먼저 호명되었다. 임무는 분명했고 사회는 그 역할에 이름을 붙였다. 소방관이었다.


퇴직과 동시에 그 이름은 사라졌다. 출동 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고, 호출도, 대기 명령도 없었다. 아침이 와도 나를 부르는 곳은 없었다. 그때 가장 먼저 밀려온 감정은 자유가 아니라 공백이었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보다,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감각이 더 컸다.


사람은 일을 잃어서가 아니라, 불려지지 않을 때 흔들린다. 매일 반복되던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사라지자, 나는 순식간에 ‘잊히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퇴직 후 가장 두려웠던 것은 늙음도, 무력함도 아닌 ‘사라짐’이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뜻밖에도 글쓰기였다. 처음엔 기록이었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내 글에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온도가 있었다.


“공감됩니다.” “읽으며 위로받았습니다.” “오늘 하루를 다시 살 힘이 생겼습니다.”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문장은 내 안에서 오래 울렸다. 그때 깨달았다. 존재란 꼭 현장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방관 시절, 출동 벨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퇴직 후, 댓글 한 줄은 나를 다시 삶으로 불러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았다.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온라인 이웃은 링크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다. 진심으로 읽고, 진심으로 반응할 때 그 연결은 마음의 구조선이 된다. 슬픈 날에는 “괜찮으신가요?”라는 질문이, 기쁜 날에는 “함께 축하합니다”라는 문장이 하루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글은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다. 글은 존재 신호다. “나는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 신호를 받아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다시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는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불을 끄던 손은 이제 문장을 다듬고, 현장을 지키던 눈은 마음을 살핀다. 과거의 불꽃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나는 단어와 문장으로 새로운 불꽃을 피우고 있다.


자기계발이란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일이 아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오늘 할 수 있는 한 줄을 쓰는 일이다. 어제보다 나아지기 위해 오늘의 나를 기록하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도 한 줄을 쓴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라며.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로 나를 증명한다.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지금 당신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전환의 신호이다. 불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오늘의 한 줄을 남겨 보시기 바란다.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닿고, 다시 당신을 삶으로 불러낼 것이다.


<이웃의 공감 댓글>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글은 포스팅뿐만 아니라 댓글에서도 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약 33년간 군 생활을 마치셨을 때 이런 마음이셨을지 짐작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살아오신 작가님의 삶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그동안 개인의 안녕과 삶에 더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회를 위해 어떤 부분을 이바지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감사한 분들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공부를 가르쳐 주셨던 대학교 선배님들, 그리고 이번 책을 쓰는 과정에서 아낌없는 응원과 칭찬을 보내주신 블로그 이웃분들입니다. 생각해 보니 감사할 일이 참 많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특히 종이책 퇴고로 지쳐 있던 시기에 주진복 작가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이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작가의 답글>

아버님의 33년 군인 생활 이야기를 들으니 저 역시 깊은 공감과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힘든 퇴고 과정 속에서 제 작은 댓글이 위로가 되었다니, 그 말씀에 오히려 제가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지금처럼 서로의 길을 응원하고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함께 좋은 글과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님의 책 출간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작가노트>

퇴직 후 존재의 공백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글을 통해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 순간을 기록했다. 이 글은 사라짐이 아닌 전환의 시기에 있는 나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의 문장이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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