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버에서
새벽에 쓴 글을 전하는 일은 많지 않은데요. 어쩌다 보니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2024년 3월 20일 오후 11시 58분. 이제 쓰기 시작했으니, 내일이 되어야 끝나겠지요. 곧 새벽이라 공기가 서늘해요. 캐모마일 차를 한 잔 끓여 왔고요. 작은 초도 하나 켰습니다. 찻잔 위로 오르는 하얀 연기, 초 끝에 선 노란 불꽃. 이런 걸 보고 있으면 공기가 조금 데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여전히 코끝과 손끝은 시리지만, 눈에 닿는 온기에 기대 첫 편지를 완주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기 전에 혼자 숲으로 산책을 다녀왔어요. 저녁을 준비하려고 1층 주방으로 내려갔을 때, 거실 창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거든요. 하늘이 넓은 이곳 덴버에선 해가 조금만 움직여도 하늘빛이 눈에 띄게 달라진답니다. 해 질 무렵엔 더더욱이요. 아이들은 방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영상으로 업무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저녁 준비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죠. 메뉴를 고민하다가 ‘된장찌개’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앞치마를 덧입었습니다. 그때부터 머릿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어요. 막상 몸을 움직여 시작하면 별거 아닌 일인데, 일의 순서를 생각만으로 따라가다 보면 버거울 때가 종종 있잖아요. 달리기 전에 달리는 과정을 떠올리면 미리 지치는 것처럼요. 냉장실에서 된장과 호박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바지락을 꺼내 해동시키는 일. 팬트리에서 감자와 양파를 꺼내 껍질을 깎고 씻어 도마 위에서 자르는 일. 여기까진 견딜만했어요. 그런데 세상에! 두부가 차고 쪽 냉장고에 있지 뭐예요. 거기에 가려면 차고 문을 열고, 신발을 신고, 계단을 세 개‘나’ 내려가야 하거든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애써 붙잡고 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말았어요. ‘지금 꼭 저녁을 준비해야 해?’ 저는,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숲으로 들어섰을 땐 해가 더 많이 기울어 있었어요. 짙은 회색 구름과 붉은 노을이 뒤섞인 하늘은 주방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습니다. 온통 하늘뿐인 하늘. 이곳 하늘을 보고 있으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주에선 지구의 노을을 볼 수 없다고 하잖아요. 우주에서도 볼 수 없는 지구의 노을. 그 귀한 장면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오길 잘했다 싶었고요. 조금 달려볼까도 싶었어요. 수명을 다한 페가수스 러닝화를 신고 나갔는데, 은퇴한 페가수스에게 다시 달릴 수 있겠냐고 묻고 싶더라고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무릎 부상을 생각해서 달리진 않았습니다.
멀리 호수를 배경으로 커다란 개 두 마리와 남자 한 분이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한 마리는 짙은 베이지색 긴 털을 가졌고, 또 한 마리는 검은색 짧은 털에 눈가에 옅은 갈색 무늬가 있었습니다. 두 발로 서면 제 키보다 클 것 같았는데, 두 마리 모두 목줄이 없더라고요. 이곳엔 반려견에 목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개를 무서워하는 저에겐 안된 일이지만, 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개들을 보면 그게 더 순리에 맞다 싶어요. 개들이 너무 신나 보이거든요. 목줄에 매여서 머리와 다리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는 개들에게선 볼 수 없던, 당당하고 힘찬 표정이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그건 개들의 사정이고요. 저는 얼음이 되었죠. 그사이 해는 더 기울어 하늘은 보다 어두워졌고, 회색 구름은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검붉은 노을이 그 순간엔 왜 그렇게 괴기스럽던지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두 마리의 개는 갈지(之) 자로 산책로를 걷거나 달리다가 땅에 코를 대며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점점 저와 가까워졌어요. 개가 가까이 오면 저는 온몸의 세포가 세로로 바짝 서서 굳어버리는 느낌이에요. 다가오는 개를 쳐다볼 수도 없답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웅크려 앉아버리기도 해요. 돌쟁이 아기들이 자기 눈에 안 보이는 건, 없다고 믿는다잖아요. 저도 딱 돌쟁이처럼 되어버리는 거죠. 다행히 견주인 남자가 개들보다 앞서 걸어오고 있었어요. 저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영어를 잘 못해서 문장을 여러 번 떠올린 다음에야 말할 수 있는데요. 그 순간엔 말이 저절로, 그것도 빠르게 나오더라고요. 이런 게 생존 영어일까요?
“I feel so scared. Please take care…….” 남자는 제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어요. 이런 일은 정말 드물답니다. 그는 두 마리의 개를 불러 안았고 제가 그 옆을 재빨리 지나가는 걸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뭔가 이상했어요. 그 남자에게 무섭다고 말하면서 제가 지나칠 정도로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미소를 지었달까요. 웃으면서 무섭다고 말한 제 표정이 어딘가 연극적인 것 같았습니다. 표정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속에 품은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심리 상태가 겉으로 드러남’이라는데, 어쩌자고 저는 그토록 활짝 웃으면서 무섭다고 말했을까요. 이런 게 연기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며칠 전, <자연에 빠지다>라는 유튜브 영상을 봤어요. <몸이 답이다>, <달리기가 내게 알려준 것들>을 쓴 오세진 작가님이 자연 곳곳을 다니며 촬영한 영상을 공유하는 채널인데요. 제가 본 것은 설악산을 오르는 영상과 일본 나고야 여성 마라톤 풀 코스 완주 영상이었어요. 험준한 산을 몇 시간씩 오르면서도, 영상 장비를 들고 풀 코스를 완주하면서도 작가님은 인상을 한 번도 찡그리지 않으시더라고요. 오히려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을 만큼 환하게 웃고 계셨어요. 억지웃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짜 즐기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산을 오르고 달리니까 분명 힘들 걸 아는 데도 견딜만한 고통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타인의 고통이 견딜만하게 느껴지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혹시 아시나요? 저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나도 저 경험, 해 보고 싶다. 고통을 즐길 수 있는 멋진 경험!’
호수를 돌아 나오면서 오세진 작가님의 웃음이 생각났어요. 고통스럽겠지만 그 웃음을 따라 산도 올라 보고 싶고, 풀 코스도 달려 보고 싶던 제 마음도요. 그러다 제가 아는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힘들다고 고민을 털어놓던 사람들. 감정이 복받칠 땐 울기도 했지만, 그 대화를 마무리 지을 땐 웃으면서 “사는 거 진짜 힘들다.” 이렇게 말하던 얼굴들이요. 우리는 아프다고 말하면서, 힘들다고 말하면서 웃고 있더라고요. 힘든 고백 끝에 웃고 있던 얼굴을 향해 ‘로우팅’을 외쳤던 기억도 따라왔습니다.
로우팅(Low-ting)은, '파이팅'과 닮은 듯하지만 결이 다른 응원의 말입니다. 아무도 들리지 않게, 마음으로 전하는 낮게 속삭이는 응원.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는 대신, 당신의 힘 빠진 뒷모습까지 지지한다는 응원이랄까요. 아, 이 말을 처음 들으신다고요? 아마 그럴 거예요. 로우팅은, 5년 전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제 귀에 들려온 말이거든요.
달릴 때, 종종 웃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잘한 것도 많고 꽤 괜찮은 면모도 있는데 그런 건 모두 축소되고 저의 못난 모습만 커다랗게 보일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저는 당연히 달립니다. 달리면서 흘리는 땀, 피부에 닿는 바람, 햇살, 달린 뒤 차오르는 성취감, 이런 것에 기대어 작아지는 기분에서 벗어나길 바라곤 해요. 하지만 늘 성공하진 않아요. 달리기가 늘 답이 될 수 없고, 늘 기댈 수도 없어요. 그 시간은 그 시간대로 통과해야 한다는 걸, 달리면서 더 크게 깨닫는 날이 많습니다. 달린다고 작고 싫어지던 내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나에게 너그러워질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달까요. 어쩌면 달릴 때 제가 웃는 건, 저에게 너그러워지려는 연습일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좀 고통스럽지만, 나는 웃을 수 있어. 이 고통을 달랠 수 있어. 이런 나, 좀 괜찮지 않아?’하는. 순간의 기분으로 나를 구석으로 몰지 않겠다는 작은 응원으로서의 웃음이랄까요.
제가 견주에게 무섭다고 말하면서 크게 웃은 건, 연극적인 게 맞네요. 그 순간 바짝 쪼그라든 저를 조금이라도 펴주고 싶은 의지가 만든 표정 연기. 달리면서 연습해 온 ‘셀프 로우팅 연기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달까요. 오세진 작가님이 설악산을 오르고 풀 코스를 달리면서 웃는 것도 어쩌면 저랑 비슷한 이유는 아닐까요? 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분은 정말 즐거워 보였거든요. 하지만 또 모르죠.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그분만의 연습이 그 웃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지도요. 다만, 고통스러운 순간에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응원하고 싶어지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타인이든, 저 자신이든 말이죠. 혹시, 선물 님도 달리면서 웃을 때가 있으신가요?
집에 도착하니 사위가 깜깜해졌어요. 늦은 저녁을 차려 먹었습니다. 차고 냉장고에 든 두부는 얼마든지 꺼내 올 수 있었고, 머릿속 순서도가 사라진 된장찌개는 금세 끓일 수 있었어요. 식구 중 누구도 불평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불평했으면 저는 아마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아, 삼시 세 끼는 진짜 힘들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새벽 4시가 넘었네요. 생각보다 오래 쓴 편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긴 시간 편지를 쓰게 될까요?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 시간 역시 너무 숨 가쁘지 않게 웃으면서 달리는, 우리에게 너그러워지는 ‘로우팅의 시간’이 되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