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달리기

동탄에서

by 래미

'봄인가' 싶다가도 '아직 아닌가?' 하고 겨울을 다시 꺼내볼 추위마저 다녀간 시간의 빈틈으로 이제야 비로소 정말 봄임을 실감하는 날들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피곤함에 못 이긴 오후의 목 고개가 자울자울 할 때면 봄의 시간 안에 살고 있음을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남쪽 도시의 오래된 벚꽃 축제는 개화 예측 시기를 잘못 예상해 벚꽃이 없는 벚꽃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마흔 번도 넘게 봄을 맞고 있지만 이제 '진짜 봄날이야'라고 여겼던 예측이 자주 빗나가는 시간으로 새봄을 채워가며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자연의 일과 다르게 달리기는 오래도록 달린 시간과 비례해 나를 살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달려온 시간 경험의 깊이와 부피가 쌓이고 있기에, 달리기는 어쩌면 나를 더 잘 알아가게 되는 일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따라서 래미 님이 달린 오랜 시간의 힘이 현재 지점에서 '웃으면서 달려야 하는 이유'를 보석을 발견하듯 보이지 않던 스스로를 보이게 해 주었을 겁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채 되지 않은 저는 아직은 웃으면서 달려본 기억이 없습니다. 4분대를 뛰는 러너들의 질주를 보면 부러운 질투가 다리를 감아 죄이고 왜 아직도 나는 5분 30초 보다 빠른 페이스로 쉽고 편하게 달리지 못할까, 제 달리기의 마침 지점인 7킬로미터를 앞에 두고 3킬로미터를 보태어 10킬로미터를 달려보자는 마음 앞에서 수백 번 갈등하게 될까, 싶습니다. 즉 저에게 달리는 일은 여전히 육체적으로도 고통으로 여겨지기에 래미 님처럼 달리기가 나를 살펴 가는 수단이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여겨봅니다.


말씀처럼 달리기가 늘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시간에 저 역시 달립니다. 답을 바라지 않고 포레스트 검프처럼 길고 지속적으로 오래, 죽을 때까지, 끝까지 달려서 이 '고통을 상쇄하겠어.' 하는 마음을 들고 달리러 나가지만 실상은 한발 디딤마다 버리고 싶은 고통이 미행하듯 따라붙습니다. 2킬로미터까지는 발뒤꿈치가 가장 먼저 아파옵니다. 2킬로미터 지점을 지나 폐와 다리와 발바닥이 적응할라치면 나를 괴롭게 하는 지금 실존하는 고통이 따라옵니다. 지치지도 않고 쫓아옵니다. 오히려 그 괴로운 생각들이 육체적 고통을 잊게 하고 그러다 보면 종료 지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면 달리면서 내가 무얼 보고 치동천을 지나쳤는지, 어떤 사람들이 나를 스쳐서 갔는지, 오늘 밤공기는 어떠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괴로움을 불러오는 생각에 달리기 하는 나 자신의 존재는 잡아먹혀 들어갔습니다. 고통의 본질을 오래 살펴온 스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삶은 원래 고통이고, 고통을 잘 살펴보면 고통 자체가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며 파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기에 가만히 고통을 지켜보면 어느새 고통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없는 말은 '가만히 지켜보면'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것일까요? 조용히 눈감고 앉아 호흡을 의식하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명상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고통에 완전히 빠져 내가 어떻게 달려왔는지조차 몰랐던 그 시간. 어떤 것에 완전히 빠져 있는 순간. 그것을 '몰입'이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그 상태를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오직 현재에 깊이 머무르는 그 순간인 것이죠. 몰입의 대상을 고통이 아닌 '나'라는 존재로 대체하며 달릴 수 있다면 마음을 번잡게 하는 일상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조금은 더 본질적인 것들과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바라던 것이 무엇이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면 달리기는 어쩌면 가만히 나를 지켜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웃게 할 수 있는 기쁨이 될지도 모릅니다.


달리기, 달리는 것은 여전히 저에게는 육체적인 고통이 따르고 삶의 크고 작은 괴로운 걱정거리, 두려운 일들, 불안한 미래 생각들과 함께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달리는 그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그 순간에는 그 고통들과 불안에 오롯이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해답을 발견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마음이 한결 맑아지고 어떤 수준만큼은 덜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또렷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달리는 시간이 쌓여가다 보면, 내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순간도 만나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프 달리기를 넘어 30킬로미터, 42킬로미터, 50킬로미터를 뛰어보면 더 깊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달리기 하러 나갑니다. (요사이는 달리는 고통보다 내가 왜 이렇게 달리기에 게을러졌을까 하는 자책의 고통이 더 큽니다만) 비록 웃음기는 없지만 짧은 삼매의 순간, 몰입의 순간을 경험 한 겹을 쌓겠다는 다부진 마음은 챙겨서 집을 나섭니다. 그 순간에 나와 함께 하는 것이 헐떡이며 숨이든 발뒤꿈치와 무릎 통증이든, 살아내면서 피해 갈 수 없는 고통의 생각이든 그것을 만나러 나갑니다. 이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저도 42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스스로 나를 좀 더 밝게 비추는 어떤 빛의 순간, 더 밝게 비춰오는 별의 순간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쁜 기대를 갖고 달리기의 첫 뜀을 시작합니다. 다음 글로 또 만나길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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