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달리기

동탄에서

by 래미

탐구 생활 이야기를 하시니 연노란색의 얇고, 교과서보다 훨씬 더 컸던 그 책이 생각납니다. 시골 마을에 살던 제가 할 수 있는 탐구생활 속 과제도 있었지만, 논과 들에서 하릴없이 그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일이 대부분이었던 제가 할 수 없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백과사전 같은 자료나 도와줄 어른이 없었음은 물론이었죠. 그러다 보니 저는 환경에 빨리 순응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이건 내가 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정신 승리로 빠른 포기를 했었습니다. 잘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이나 성취동기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탐구생활만 그랬을까요. 일기나 겨우 채워서 갔지 만들기나 그리기 등의 방학 과제(그 시절에는 방학 숙제가 왜 그리 많았던지요.)는 엉망으로 해 들고 가면서도 부끄럽지는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정도가 이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면서 래미 님처럼 대단하게 잘 해온 아이들을 보면 '저 아이들은 나와 다른 아이, 내가 넘어설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어쩌면 가난이 준 환경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라는 동기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래미 님의 잘하고 싶다는 숨겨진 욕망이 상장 욕심은 아니었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껴보고 싶고 나는 무엇이든 책임감 있게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내적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어떤 일의 성취에 있어 내외적 동기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오늘은 달리기 하면서 발견한 저의 숨겨진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드려볼까 합니다.


방학 숙제는 늘 꼴찌 수준으로 못했지만, 지금의 저는 달리기를 잘하고 싶습니다. 4분 50초 페이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속도를 낼 수 있는 달리기를 하고 싶어요. 남들이 보면 빨리, 잘 달린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요. 확연한 능력 차를 보이는 달리기 고수가 아니라면 저를 뒤따라오는 러너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하고, 저를 앞질러 가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를 냅니다. 그러다 오버페이스를 하게 됩니다. 달리기가 끝나면 무릎과 발목이 아파서 끙끙거리기도 하고, 결국 따라잡기에 실패하면 소소하게(?) 패배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20~30대 젊은 러너들을 따라잡아 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치동천 반대편에서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게 따라 잡히면 기분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져서 달릴 때도 있습니다. 저의 달리기 속도를 평가받아야 할 이유도, 평가할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서 기분 널뛰기를 하며 달리는 거죠. 뛰는 사람이 많은 시간의 달리기뿐만 아니라 아무도 없는 밤늦은 시간에 뛸 때조차 홀로 느리게 6분대로 뛰고 있으면 느리게 달리는 저를 자책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러너인데 이렇게 느려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자꾸 속도를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나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면서 천천히 달리고 있는 나라도 스스로가 예뻐해야 한다는데 말이죠. 그런 저를 볼 때마다 저의 숨겨진 욕망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단 안에 속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스스로 몸의 무리를 느끼면서까지 빨리 달려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빨리 달리려는 노력을 통해 저 스스로 달리기를 잘하게 되는 발전의 성취를 얻고자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5분 30초대 정도는 달릴 수 있다고 말할 때의 뿌듯함과 상대가 보내는 인정의 눈빛을 보며 쾌감을 갈구하고 있는 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젠가 글에서 고백하셨듯이 래미 님처럼 저도 '달리기 하는 내가 좋아서' 달리기 하는 이유도 있지만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달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안고 뛰고 있었습니다.


'승자의 뇌'라는 책에서 사회적 인정이 에이즈 환자를 대상으로 한 면역체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실험 결과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같은 에이즈 환자라도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들은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비난과 배척으로 인한 수치심을 훨씬 더 크게 느낍니다. 그 결과 체내에서 병원균과 맞서 싸우는 CD4-T세포의 면역 기능이 다른 경로로 감염된 에이즈 환자보다 현저하게 낮았고, 평균 2년 정도 더 빨리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집단에서의 인정과 안정된 소속감은 수명마저 좌우할 수 있는 내려놓기 어려운 무서운 집착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강렬하게 인간을 지배하는 인정받고자 하는 일종의 인정 지위 욕망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치동천의 지렁이에게서 배웁니다. 비가 오면 땅이 물을 머금기 때문에 땅속에 살던 지렁이는 숨을 쉬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길 위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비가 내리라는 것을 지렁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죠. 어리디 어려 낚시 미끼로도 쓰이기 어려운 실지렁이, 그보다는 크지만 그래도 어린 지렁이, 몸통 굵고 힘센 큰 지렁이까지 보입니다. 달리면서 지렁이가 눈에 띄면 '아, 내일은 비가 오는구나!' 하고 저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 죽어라고 애를 쓰며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나온 지렁이의 운명은 어떠할까요? 길 건너는 데 성공하지 못한 수많은 지렁이가 시멘트 길 위에서 힘이 빠져 말라죽어갑니다.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에게 밟혀 몸통이 터지고 떨어져 나가 개미 떼, 파리 떼의 먹이가 됩니다. 밟혀 죽지 않으려고 애조차 쓸 수 없이 밟혀 죽은 지렁이가 눈에 밟혀 자꾸 뒤돌아보고 살펴보고 두리번거리면서 달리게 됩니다. 죽어 널브러진 지렁이의 사체를 보는 것이 괴로워 비 오기 전날과 비 온 다음 날은 참 달리러 나가기 싫어집니다.


저대로 두면 더 이상 건너갈 힘을 잃고 길 위에서 말라죽거나 사람들에게 밟힐 운명의 지렁이를 그냥 보아 지나치기 참 어렵습니다. 급한 마음에 손으로 잡아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길가 풀숲으로 던져줍니다. 몸이 말라가는 지렁이는 얼른 치동천으로 내려가 물을 끼얹어 주고는 젖은 풀 흙 사이에 놓아줍니다. 구덩이에 빠진 돼지를 구하기 위해 마차를 세웠다는 링컨의 이야기처럼 이런 저의 행동은 그저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는 것일 뿐 '자비심'이나 '생명윤리'의 실천이 아닌 윤리적 이기주의 수준의 행동입니다. 치동천 7킬로미터를 달리는 중에 길 위의 죽을 운명의 지렁이를 만나고, 만나고, 다시 뒤돌아가서 지렁이를 던져주고 달리다 보니 달리기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 킬로미터 당 속도는 7분대에 가까워집니다. 저의 달리기 목적이 훼방을 받고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살기 위해 애쓰다 결국 죽음의 위험에 가까워진 지렁이를 던져주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 왜 달리는가?'하고 말이죠. 지렁이도 저도 결국 살기 해서 달리는 것 일 텐데요. 저의 달리기 목적 중의 하나가 건강한 몸으로 맛있는 맥주를 오래 맛보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려면 빨리 달리기보다 좀 느리더라도 오래 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래도록 달리기 위해서는 인정의 속도 욕망을 위한 빠른 달리기가 아닌 내 몸을 살피면서 알맞은 속도로, 남과 경쟁하지 말고 조금 느리게 달려도 괜찮지 않은가. 하고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통증과 부상을 안고서까지 속도를 위해 계속 달린다면 길을 건너지 못한, 길 위의 지렁이처럼 되지 않으란 법이 없습니다. 이것 역시 지렁이가 만들어준 환경에 제가 순응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느린 지렁이 달리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왜냐 하고 물어도 답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굳이 말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달리기의 쓸모와 기쁨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전 02화고통의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