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버에서
논과 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지렁이를 살리느라 빠르게 달리고 싶은 욕망을 품고도 느리게 달릴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네요. 환경에 순응한다는 것이 그저 자신의 한계를 빠르게 인정하고 포기하는 정신 승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편지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순응에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따른다는 넓은 의미도 있지만, 감각기관이 외부의 상황에 익숙해지는 ‘조절’이나 ‘순화’의 좁은 의미도 있다고 해요. 크고 작은 생명을 울타리 삼아 하릴없이 보낸 그 시간 동안, 선물 님의 감각이 ‘살아있음’에 익숙하게 조절되고 순화된 게 아닐까요. 겨울 초입이었던 어느 날, 무봉산에서 치동천으로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고라니를 위해 생선을 사다 놓아주고 싶다 한 적이 있으셨죠. 생명의 고통에 빠르고 깊게 반응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자비인지, 생명 윤리인지, 윤리적 이기주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정의한 관념이 도착하기도 전에, 선물 님의 동물적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는 건 알겠더군요. 그 생명 감수성이 환경에 순응하며 지낸 선물 님의 힘인 것 같았습니다.
환경에 순응하며 고유한 힘을 길러오신 선물 님 이야기를 들으니, 달리기에 순응하기 시작한 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졌어요.
2주 전부터 저는 인터벌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선수나 숙련된 러너들이 달리기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한다는 그 지옥 훈련이요. 일요일만 연습하기로 했으니, 이제 두 번 한 셈입니다. 1킬로미터를 워밍업 하고, 본격적으로 인터벌 러닝을 시작했어요. 400미터 전속력 달리기와 200미터 휴식런을 한 세트로 총 10회 반복해 보기로 했는데, 글쎄요……. 그대로 되었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아, 정말, 너무,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5회쯤 되니까 입에서 단내가 나고, 허벅지 앞 근육이 빠르게 굳는 게 느껴졌습니다. 입에선 헉헉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지고요.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기도 했어요. 전속력으로 달리면 4분대 후반에서 5분대 초반 페이스까지 나오는데, 이 페이스로 10킬로미터, 하프, 풀 코스를 달리는 분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7회쯤 되니까 정말 포기하고 싶었어요.
‘나 이거 왜 하지. 이건 내가 알던 달리기가 아닌데. 하나도 즐겁지가 않아!’ 달리면서 즐기던 상상, 피부에 닿던 바람이며 햇살, 그런 게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숨차다, 힘들다, 안 하고 싶다, 이외엔 어떤 생각도 감각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원망을 퍼붓고 싶어질 때쯤, 겨우 10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욕 나올 거 같은 달리기가 인터벌 러닝이더군요.
약 6년 동안 달리면서 이런 연습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더 빨리 달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킬로미터를 6분대로 달려도 저는 충분히 즐거웠거든요. 가끔 저보다 늦게 시작한 러너가 훨씬 빠른 걸 보면 제가 게으른 것 같아 부끄럽긴 했어요. 그럼에도 즐거움을 고행으로 바꾸고 싶진 않았습니다.
실은, 거부감이 컸어요. 빠르게 달리는 게 잘 달리는 거라는 생각에 동의하기 싫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잘 달리는 사람과 잘 달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게 싫었달까요. 구분해야만 한다면, 달리기 시작한 사람과 아직 달리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고 싶었습니다. 경험은 존중하되, 달리기를 능력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평가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해야, 제가 안전했습니다.
안전하고 싶다는 것은 인정받는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는 선물 님의 욕망과 다르지 않아요. 러너들 사이에서 어떤 집단이 인정받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집단에 속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안정된 소속감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그 집단에 속할 자신이 없었어요. 꽤 오랫동안 달리고 있어서 감춰졌을 뿐, 저는 몸치라는 말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거든요. 힘을 쏟아부었는데도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좌절을 피하고 싶었어요. 저의 한계를 증명하기보다, 시작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을 유예하거나 원천 봉쇄하려는 마음이 컸습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된다니까!’ 이 명제가 거짓이란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달리기에 고수와 하수가 있다면, 6년을 달려도 더 빠르게 달릴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저는 하수여야 했어요. 달리기를 참 좋아하는데, 달리기에 기대고, 달리기가 유일한 친구였던 적도 있는데, 그런 달리기에서 하수라는 이름으로 좌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좌절이라 썼지만, 이것은 큰 의미의 소외감입니다. 진정한 러너 집단에 속할 수 없고 경계로 밀려날 거라는 생각은 소외감으로 이어져요. 소외감은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나간 곳이 절벽 끝인 기분이라, 외로움보다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저의 한계가 드러나 결국 소외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창살을 내렸어요. 오랜 시간 좋아한 달리기라서 더 단단하게 내렸던 것 같아요. 빠르게 달리는 연습을 외면한 건 물론이고, 그런 러너들의 세상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왜 인터벌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을까요. 빠르게 달리는 세상을 외면했던 이유와 정확히 같습니다.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예요. ‘소외되고 싶지 않다’의 다른 말은, ‘함께 하고 싶다’입니다.
얼마 전, 한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진행자가 이제 막 첫 책을 낸 게스트 작가에게 “거 봐요, 글 쓰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니까요!”라고 하더라고요. 글은 오롯이 혼자 쓰지만 그 시간에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해 공유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 걸, 진행자의 상기된 목소리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달리기도 글쓰기와 닮은 면이 있지 않나요? 혼자 달리지만, 달리는 동안 스치는 수많은 생각, 몸의 감각,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고통 끝에 치솟는 만족감, 우리는 이런 걸 공유하고 싶어 하잖아요. 누군가 함께 달린다면, 어떤 언어로도 표현 못 할 순간의 호흡과 땀, 공기만으로도 전해지는 공감이 얼마나 짙은가 말이죠. 여기서 ‘함께’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할 수도 있다는 걸, 이 편지를 쓰면서 알아가는 중입니다. 달리기라는 언어로 연결된 순간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가는 중이라고요.
선물 님이 처음 달린다고 하셨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실까요. 달리는 길 위의 온갖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늘었다는 반가움이 컸어요.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 운동이 달리기라고 하지만 러닝화며, 계절에 맞는 운동복이며, 적지 않은 장비가 필요한 운동이 또 달리기잖아요. 무엇보다 혼자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운동이 달리기이고요. 선물 님이 몇 번 달리다가 ‘힘들고 지겨워서 못 달리겠다!’ 하지 않도록 잘 동행하고 싶었습니다.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소속감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맞아요. 선물 님이 제가 떠나온 치동천, 그 먼 곳에서 함께 달려주셔서 참 기뻤다고, 그 이전에 달리기 세상에서 소외될까 봐 두려웠던 마음이 있었다고, 지금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물 님이 페이스에 욕심을 내시는 거예요. 이미 저보다 빠르신데, 더 빠르게 달리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낭패였죠. 제가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로 막을 수도 없고 말이죠. 선물 님 페이스에 맞춰 나란히는 못 가더라도 뒤따라는 가봐야겠다. 그렇게라도 계속 함께 달리고 싶다. 내가 느려서 놓칠 순 없다! 이것이 제가 인터벌 연습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잘 달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함께 달리고 싶어서요. 함께 달리기 위한 나의 가용 범위 늘려놓기. 그 프로젝트가 바로, 인터벌 연습이랄까요.
최선을 다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달리기를 계속하는 이유, 그것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실 거라 하셔서 내심 반가웠습니다. 1년 전쯤인가. 아직은 달리기가 즐겁지 않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달리기의 쓸모와 기쁨을 만나신 것 같아서요. 선물 님과 오랫동안 따로 또 함께 달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거 봐요, 달리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니까요!
다가오는 일요일에도 인터벌 연습을 할 겁니다. 하면서 ‘나 이거 왜 하는 거야?’ 할 겁니다. 그럴 때 선물 님 등을 보며 달릴 순간을, 함께 흘릴 땀과 완주한 순간의 환희를 상상하겠습니다. 그렇게 닫아둔 창살을 조금씩 풀어가며 함께 달리는 세상에 천천히 순응해 보겠습니다. 그럼 적어도 욕이 나오진 않겠죠?
라고 쓰지만 아직 인터벌 연습은,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