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아의 행복편지
비가 정말 많이 오던 며칠 전, 참다가 반바지를 꺼냈다. 보통 비가 오면 바짓단이 조금 젖고 마는데, 이번 비는 허벅지 높이까지 들이치길래 어쩔 수 없었다. 작년 여름에는 한 번도 안 입었던 것 같은데, 그것에 비하면 올해는 자주 입은 편이다.
어쩌다 반바지를 입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반바지는 정말 시원하다. 아무리 얇은 바지를 입어도 반바지만큼은 아니구나. 냉장고 바지도 반바지만큼은 아니었어. 반바지는 더울 때도 좋지만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때에는 더 좋구나. 더 시원하네. 내년에는 반바지 좀 자주 입어야겠다.”
그러나 말만 이렇게 하고 여름이 되면 또 반바지는 자꾸 구석으로 밀어 둔다.
그건 내 통통한 다리 때문이다. 와,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뭐랄까. 단순한 이유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듯 반바지는 정말 시원하고 편하니까.
다시 말해 봐야지. 정말이다. 내 다리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지금보다 훨씬 날씬했을 때도 반바지는 잘 안 입었다. 그래서 요즘엔 그 시절이 아깝다. 그때라도 열심히 입을걸. 아무튼 튼실한 내 종아리 때문인데, 쓰고 보니 다시 한번 정말 단순하다.
나는 종아리 콤플렉스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좀 번거로운 시간들이었다. 의도적으로 반바지를 피해 다니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경험해 본 사람이 있다면 알 텐데. 세상에 시원한 바지가 정말 많은데, 별로 시원하지도 않을 긴 바지만 고르려면 진이 빠진다.
“사람들은 네 다리에 관심 없어.”
라는 말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엄청 관심 있으므로.
“너 다리 두껍지 않아.”
라는 말도 힘이 별로 없다.
아닌데? 쟤보다 두꺼운 걸 내가 다 아니까.
대신 나를 흔들어 깨우고 반바지를 입게 하는 건 주로 이런 거다.
‘나만 이런 구질구질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사람들이 다 자신의 모든 걸 만족하며 살고 있진 않을 거야’
‘다들 본인 다리에 만족해서 반바지를 입고 나온 건 아닐 거야. 이 비가 오는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윤리와 도덕 측면에서 좀 탈락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이런 불순한 생각으로 힘을 내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극복 방법이야 어떻든 엄청 시원했다. 가을이 오는지 바람이 보송보송해서 기분이 끝내줬다. 이 느낌대로라면 반바지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년 여름이 와 봐야 알겠지만.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종아리 콤플렉스 때문에, 한여름에도 반바지를 피해 다니는 지질한 짓을 하는 사람이 나 하나라고 생각하면 무척 외롭다. 그러나 세상 어딘가에, 본인만 아는 콤플렉스로 번거롭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그럼 좀 달라진다. 여름이 끝나가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반바지를 꺼낼 수 있다.
그러니 당신도 내 유치한 콤플렉스를 보고 덜 외롭기를 바란다.
혹시 용기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은.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행복편지 지기
박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