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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이민 3년 차 회고록(?)

미운 4살처럼 이제 슬슬 이탈리아가 미워 보이기 시작할 때...

by 제시카

내가 애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흔히들 애기가 자랄 때 네 살 정도부터 성질내고 생떼 부리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는가? 드디어 이민이 제일 힘든 시기가 시작됐다. 프로 이민러로써 요즘 싫증 나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절실히 느낀다.


보통 다른 나라에 와서 처음 1-2년은 모든 게 다 신기하고, 신비롭고, 재밌고, 환상적이다. 여기가 마치 유토피아 마냥 모든 게 다 이뻐 보이는 콩깍지를 씌어서, 매일매일이 신나고 행복하다. 마침 모은 돈도 슬쩍슬쩍 써가며 비교적 싸게 방방곡곡 외국 여행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 웃음이 절로 지어지는 시기이다.


그러다가 3년/5년 차부터 슬슬 짜증이 솟구친다. 눈치코치로 대충 언어가 들리기는 하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늘지도 않는다. 심지어 주위 사람들도 몇 년째 제자리인 것 같은 내 언어 실력에 슬슬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짜증이라도 부리면 그나마 낫다. 귀찮으니 보통 나도 모르게 멀어진다.) 어쩌다 용기 내서 혼자 장이라도 보다가 무례한 사람들을 맞닥트리고 나면, 그게 그렇게 몇 날 며칠 내내 서럽더라. 잔소리 듣기 싫어 태평양을 건너서 도망 왔는데, 막상 떨어져 살고 있으니 핏줄도 보고 싶고, 모아둔 돈도 슬슬 떨어져 간다. 그렇게 매일 집에서 공부하고 일하다 보면 집 밖으로 못 나가는 날도 허구한데, 내가 여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나이에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이 파도 같이 밀려들어온다.


그래서 새벽에 홧김에 이탈리아 흉이나 잔뜩 보련다.


1. 이탈리아 청년들은 학위에 목숨을 건다.

이탈리아 대학도 캐나다 대학처럼 졸업하기가 엄청 어렵다. 심지어 교수들은 한국처럼 굉장히 권위적이어서, 실력으로 졸업한다기보다 교수 비위 잘 맞춰야 무사히 졸업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그런지 하나 같이 졸업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세다.


캐나다에서는 좋은 학교 졸업하면 다닐 때는 뭐 당연히 으쓱할 수 있다. 나도 많이 부러웠고. 근데 그 으쓱을 계속하려면 명문대 졸업해서 미국 대기업이나 가야 끼리끼리 다니는 거지, 졸업하고 나서도 직업 못 찾아서 사람 구실 못하고 집에 쳐박혀 있거나 알바로 겨우 목숨 연명하는 젊은이들이 훨씬 많아서 대학 졸업하고 나면 서로 그렇게 show-off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만약 하더라도 '쟤는 저 나이에 아직도 저러고 다니네' 소리나 들을 것이다.


근데 여기에서는 다르다. 3년 학위 과정을 10년 만에 졸업해도 동네 방방곡곡 소문낸다고 파티를 하는 친구도 있고, 내가 "박사 학위다" 떵떵거리며 만년 백수/백조를 살고 있는 친구도 있고, (물론 그중에는 당연히 좋은 학교 가서 자랑스럽게 대기업 노비 하는 친구들도 있다. 걔네들은 거의 신격화되어 버리는 바람에 '잘 산다더라~' 소문만 은근히 들린다. 알다시피 최저 임금도 없는 이탈리아에서 좋은 직업은커녕 직업 찾기도 하늘에 별 따는 만큼 어렵거든), "내가 너보다 가방 끈이 긴데, 감히 내 의견을 묵살해?" 하는 모자란 친구들도 아주 많아서 깜짝 놀랐다.


캐나다에서도 (심지어 스몰 비즈니스 운영해도) 분명 일할 때는 위계질서가 있다. 근데 그게 학위보다는 실력과 연줄이 중심이라, 가방 끈은 짧아도 잘 먹고 잘 사는 친구들도 많은데, 이탈리아에서는 장벽이 훨씬 두텁다. 마치 한국처럼 어릴 때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 같더라. 학생 때 공부 못해서 또는 안 해서, 하다 못해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물론 대학은 캐나다나 한국보다는 학비가 싸지만) 대학을 못 가면, 그때부터 헬게이트 시작이다. 직업 구하기도 어렵고, 막상 잡아도 맨날 무시만 당한다. 실력을 증명해도 학위가 받쳐주지 않으면 하등 쓸모가 없다. 페이는 물론이고, 이직이나 프로모션도 기회가 잘 없다.


2. 위계질서가 한국 급이다.

지금 블랙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장은 더럽고 치사해도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IT 쪽에 취업난이 거의 코로나 시절 서비스직처럼 바늘구멍이라) 상사가 아주 제멋대로다. 의견을 내면, '네가 뭔데'를 시전 하고, 일하는 시간 동안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간다, 전화 5분 늦게 받았다고 욕이란 욕은 다하고, 소리 지르고, 성희롱에다가 잘릴 번까지 했다. 요즘 잠도 잘 못 자고, 일할 생각만 하면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정직원이 되면 해고가 정말 귀찮게 프로세스 되어있어서 미국처럼 홧김에 자르기가 힘들다. 1년 내내 괴롭힘을 받는 중인데 윗 대가리는 고칠 생각도 전혀 없어서 계속 도망칠 궁리만 열심히 하고 있다.


가끔 그 뭐시냐, 조회수를 위해선지 모르겠지만, 외국은 헬조선과 다르다! 여기는 천국이다! 외국인은 위계질서 없다! 이딴 소리 듣고 있으면 진심으로 포스트 신고하기를 눌렀다가 취소했다가 그런다. 속 뒤집히는 글 중에 하나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다른 프리랜서 일도 시작했는데, 시간은 없는데 돈은 안 벌린다. 요즘 시세로는 까까도 못 사 먹을 정도로 작은 쌈짓돈을 어영부영 모으고 있긴 한데, "폭삭 속았어요"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나오는 수돗물은 졸졸졸인데, 나가는 돈은 폭포처럼 샌다. 부귀영화는 개코. 먹고살기도 빠듯해졌다.


근데 이걸 누구한테 하소연하겠냐고. 저 멀리 나보다 힘들게 살고 계신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랴? 내가 무슨 상황에 있는지 공감도 못하는 시댁에 하랴? 친구들은 왜 하필 다 이때 애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다. 돈도 없어서 밥도 굶는 와중에 상담할 염두도 못 내겠다. (캐나다인들은 누가 정신과 상담 했다고 하면, 상담비가 워낙에 비싸서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 넉넉해서 우울할 수도 있고 그 우울 치료한다고 돈 몇 백도 턱턱 낼 수 있는 할 일 없는 백수 부자 취급을 해준다.ㅋㅋ)


그래서 나는 젊은 이탈리아 (특히 소녀들)이 가르치는 이탈리아 수업이 제일 싫다. 배운 게 학교에서 본 나쁜 선생들밖에 없어서, "이게 왜 안돼?" 표정으로 시종일관 책만 주야장천 읽는다. 모르는데 자꾸 물어보니 시도는 하는데 다 틀리고,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가니 오랜만에 눈물이 나왔다. 요새 튜터 일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해서 다시 수준이 내려온 게 나 자신에게 너무 분하고 괘씸하다. 빨리 잘하고 싶은데...


3. 캐나다도 그렇고 이탈리아도 그렇고 다들 비교하느라 바쁘다.

누구 집 아들이 결혼했단다. 집을 샀된다. 아이가 생겼단다. 아이고, 한국만 그러는 거 아닌뎁쇼. 내가 4개국을 다 오랫동안 살아본 결과, 어느 하나라도 비교 안 하는 종족(?)이 없더라.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이민자들도 투자를 억대로 했으니 결괏값 보고 싶어 안달 났고, 그나마 유학 온 학생들이 보통 집안 빵빵한 여유로운 학생들만 봐서 그런가 겉으로는 덜해 보이던데, (아님 내가 못 살아서 비교조차 못 하는 레벨이라 잘 못 끼어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다). 억대로 벌면 또 다른 몇 십억 버는 사람들 보며 비교하던데. 여하튼 남녀노소 불문, 잘 먹고 잘살면 축하도 해주지만, 배알 꼴리는 사람도 많더이다.


4. 캐나다보다 공기의 질도 너무 안 좋다. 캐나다는 쓰레기를 매립한다면, 이탈리아는 태우는 식이라 여기서 비염 달고 다니는 사람 정말 많다. 폐 질환도 종종 있는 것 같더라. 나도 캐나다에서는 없었던 온갖 알레르기가 생겼다. 근데 망할 놈의 퍼밋 때문에 의사도 못 봐서 약국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5. 캐나다는 오지랖이 정말 심하다. 여기저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간섭해서 짜증 나는데, 반대로 말하면 당신도 여차하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근데 여기서는 한국처럼 경찰서 갈 생각 하는 거 아니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서로 참는 분위기이다 보니까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6.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캐나다에서도 해야 할 일 없으면 되도록 혼자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행동반경이 더 제한돼버렸다. 답답하다. 여기는 카공도 없다 ㅠㅠ 한국 음식 못 먹는 건 또 몇 년 되니까 나름 적응이 되는데, 여행 다니고 싶다 ㅠ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내가 이래서 기생충처럼 늙어빠지도록 부모님 옆에 기생하고 있었는데, 기어코 해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독립하는 거 너무 싫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이 먹는 게 제일 싫었어!!!!!


평생 놀고먹고 싸고만 하고 싶다. 돈 걱정 좀 그만하고 싶다!!!!!!!!!


놀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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