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단위로 이민 올 때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에 대해서
틈이 날 때면 종종 소셜 미디어를 구경하며 잠시 숨을 돌리는데, 요즘에는 특히 다른 한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구경하는 게 낙이다. 나도 슬슬 나이가 드니까, 이제 부모의 입장에서 가족 단위로 이민 오는 사람들의 글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읽다 보면 마치 짧은 수필을 읽는 것 같아서 좋다.
그런데 종종 새로운 나라에 적응함에 따라 아이들이 정체성에 대해서 묻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또는 나는 이렇게 했다 식의 글들을 읽을 때가 있다. 물론, 결국에는 남의 집 일이니까, 내가 섣불리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런데도 똑-같은 레퍼토리를 몇 달째 반복해서 읽고 있자면, 아휴, 너무 답답해서 결국 못 참고 여기다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내가 뭐, 요즘 친구들 같이 한국어도 영어처럼 혀를 굴릴 만큼의 교포는 아니지만, 남들은 사춘기를 겪을 때, 나는 나라를 세 개나 년 단위로 바꾸느라 정신없기 보내기도 했고, 심지어 나같이 자아 확립이 된 상태에서 한국을 떠나 멀리 살아도, 그 기간이 오래되다 보니까 (특히 캐나다에 살 때는 그 사회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무던히도 나 자신을 지웠었다...) 가끔 내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민 간 부모님들은 혹시 아이들이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 정말 깊게 생각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러고 나서 아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결정을 해주면 좋겠다.
이게 1세대 이민자의 입장으로는 아이들이 어릴 때 왔기도 했고, 한국말보다 그 나라말을 더 잘하고, 그 나라 문화를 더 잘 이해하니 섣불리 "당연히 너는 여기 사람이지. 그러니 누가 묻거든 여기 사람이라고 해."라고 종종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특히 요즘 같은 신냉전 시대에는 더 그렇다.
첫째, 외국인은 영원한 이방인이다. 캐나다 쪽은 아직 대놓고 차별하는 건 '나 교양 없소'라고 광고하는 꼴이라 겉으로는 티를 안 낼 테지만, 여전히 주류 백인이 아닌 이민자가 '나는 캐나다인이에요'하는 걸 싫어한다. 나도 실제로 시민권을 얻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가 교수한테 다신 그런 얘기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고, 내 친구도 여기에서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캐나다인들이 "너희 조부모님이 여기서 태어나신 건 아니잖아." 소리를 들었다. 여기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친구한테도 "진짜 캐나다인을 사귀고 싶은데"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둘째,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다른 친구들에게 "나도 너네랑 같은 민족이야"라고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했다간, 학교에서 차별주의자 아이들에게 표적이 되기 쉽다. 왕따나 괴롭힘은 물론, 선생님도 잘못 만나면 교실에서 아예 배척당하기 쉽다. 특히 요즘 더욱더 세계적으로 차별 주의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말하기 십상인데 걔네가 당신의 아이가 받을 상처에 대해 1초라도 고민하고 말할까? 전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본인이 맞은 걸 증명해 내느라 더 악질적으로 괴롭히겠지,
이뿐만 아니라 다른 2세 친구들도 한국말을 못 할 정도로 캐나다나 이탈리아에서 자랐지만, 여전히 여기 사람들은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지칭한다. 한국계 캐나다인도 아니고 한국계 이탈리안도 아니고 그냥 "한국인." 그 친구들은 오히려 나한테 되묻더라. "왜 자꾸 남의 나라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야? 한국인인 게 부끄러워?"
상대방 쪽에서는 "너는 여기 사람이 아니야!"라는데 집에서는 "너는 여기 사람이야!"라고 몇 년 몇십 년을 그렇게 끝과 끝으로 대립하게 되면, 이게 정말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만큼 정체성이 흔들릴 것이다. 그 뿌리가 흔들리면, 정말 짜증 나고, 우울하고, 서글프다.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나와 "나는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본인이 그렇게 정했으니 이렇게 불러달라는 느낌인 것 같나 보다. 여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아마 당분간은 더 심해질 것이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세계적으로 교류하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프로그램들을 보면 교포들이 한국에 와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를 찾으려고 한국에 왔어요."이런 느낌으로 본인 PR을 많이 하던데. 요즘은 달라졌다. 그들이 한국인임을 인정하는 시대로 넘어온 것 같다. 극단적인 예로 들자면, "흑백 요리사"에서 10년 전에 보던 똑같은 레퍼토리로 도전자는 한국과 미국을 섞은 퓨전 음식을 내놨고, 심사위원은 그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음식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시 도전하라고 했다. 그 역시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 교표였다.
캐나다나 미국이면 그나마 낫다. 커가면서 본인이 이쪽이던 저쪽이던 선택할 텐데, 여기 유럽에서는 택도 없는 일이다. 어느 글에서 "엄마,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영국 사람이에요?"라고 물으니, 부모가 "너는 이제 영국 사람이지!"라고 자랑스럽게 글 쓴 걸 봤는데. 와후! 그 아이가 앞으로 겪을 고충이 눈앞에 쫘-악 펼쳐지는데 누군지 알지도 못하지만 참 안쓰럽더라.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들 얘기해 보면 하나 같이 다들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지칭한다. [어느 나라]계 한국인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에는 "내가 한국인이야"라고 얘기해도, 그에 대한 괴롭힘보다는 다들 반짝거리는 눈으로 다가오는 친구들이 더 많다. 그게 좋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던, 아님 그 특별함을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행동이던.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가 언젠가 정체성에 대해 물어본다면, 부모가 섣불리 정해주기보다는, 스스로 오랫동안 탐구하고, 양쪽 문화를 이해하고, 그리고 나서 정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뿌리가 흔들리는다는 얘기인데, 이 뿌리를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커가면 쓰러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