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를 들으며

Clair de lune은 너무나 아름답다.

by Spring street


드뷔시의 ‘Clair de lune’ 을 참 좋아한다.

음악음 감상하기 나름이라 작곡가의 의도까지 알아가며 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곡은 작곡가와 다른 온도이고 싶지 않았고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 드뷔시는 폴 베를렌의 시 ‘Clair de lune’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해오며 초고단계에서 여러번 구절을 인용해왔던 전적이 있다. 아마 비슷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본인만의 해석을 넣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 예상해보았다.


오늘 하루도 모든 소란이 끝났고 고요한 밤, 이제는 오직 나만의 진실된 시간이다.


나는 방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신경써서 세팅한 오디오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스피커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부터 아주 조심스러운 선율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기를 진동시킨다기보다, 방 안의 분위기를 미세하게 재편성하는 것 같았다. 신경써서 조율된 오디오가 만들어내는 드뷔시의 첫 음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곡의 시작-


이 가녀린 음을 어찌해야 할까.

피아노 건반은 ‘아니 어쩌실려고 이러세요' 싶을 정도의 여운을 품고 아름답게 울린다.


검은 밤의 방 한가운데 은가루가 하나 조용히 생겨났다.

은가루는 중력을 잃고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위에 은가루가 몇개 생겨났다.

이제 더욱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가루가 천천히 계속 생겨나고 또 떨어진다.

이제 그 양은 제법 된다.


세상에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결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늦은 밤 방안까지 침범했다가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달빛 같은 것들. 혹은,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누군가의 뒷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숨을 죽였다. 작은 기침 소리 한 번에도 그 정교한 음의 입자들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았으니까.



-곡의 1분 무렵-


‘숨 이제 쉬어도 돼' 와 같은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고요의 멜로디가 나타난다.


문득 기분 나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오랫동안 이 곡을 좋아했던 탓일까. 오래전 일 부터 떠오른다. 이 기억은 결국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원래 인간은 잘 밤에 안자고 뒤척이다 보면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기어코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상표마냥 뻗어가는 법이다.



-곡의 2분 30초 무렵-


아르페지오.물결과도 같은 소리가 흐른다.

잔잔한 호숫가에 물고기가 숨을 쉬러 나왔는지 달빛 아래 호수위 윤슬의 파동,

파동도 꽤나 격했고 물동그라미 퍼지듯 잡생각도 번져간다.


실수로 지나쳐버린 인연, 놓아버린 기회, 지금이 기회인지도 모르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성.

좀 더 다정할 수 없었나, 보다 신경을 써줄 순 없었나, 그리고 그것을 표해줄 순 없었나.



-곡의 4분 무렵-


Catharsis

소리가 귀로 든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듣는 진동즈음으로 변할 무렵.

이 순간부터는 음악을 듣고 있지 않고 딴생각을 하고 있다보면 다음 곡으로 넘어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플레이어의 이전 곡 버튼 [<<] 을 한번 누르면 엥, 이 곡은 언제 들었지.

두 번 눌러도 이 곡이 아니게 된다. 세 번 쯤 눌러 이 곡으로 돌아온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랴.

모든 존재가 완벽하지 않은 것을. 모든 존재는 또 실수하고, 또 놓쳐버리고, 또 여유를 부려버리는 것을.

그리고 개인의 허무감의 끝에 달빛은 모든 존재를 따듯하게 안아준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 끝에 필연적인 상실을 매달고 온다.

학창시절, 불같던 연애, 첫 사회적 도전 등 이미 다양하게 마주했다 멀어지기도 했으니까.

마침내 기묘한 평온함이 찾아 오기 마련이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명확해지는, 일종의 포기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아니다, 포기가 아니다. 집착을 내려놓다 가 맞겠다. '포기'라는 단어는 무언가 힘없이 놓아버리는 수동적인 느낌이라, 깊은 수용의 상태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상태는 훨씬 더 능동적이어서 지혜롭게 표현하는 아름다운 용어 ‘집착을 내려놓다'가 맞겠다.



-곡의 피날레 무렵-


Morendo (사라지듯이)


격정적으로 솟구쳤던 물결의 파동이 잦아들면, 부서졌던 윤슬 조각들이 다시 하나의 매끄러운 수면으로 합쳐진다. 악보에 적힌 'Morendo(사라지듯이)'라는 지시어처럼, 버드나무 잎파리처럼 번져갔던 사고의 은가루는 물에 닿은 눈송이처럼 녹아버린다. 이제 다 괜찮다라는 달빛의 따듯한 온도를 마주한다.


‘이제 자야지 현실로 돌아가’의 가장 고요한 마침표였다.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공기 중에 남은 미세한 울림을 끝까지 붙잡아둔다.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알 수 있다.

사라지는 것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 안도감은 곧 기묘한 해방감으로 변한다.



-곡의 종료-


마지막 잔향이 스피커 유닛의 떨림을 멈추고 공기 중으로 완전히 흩어질 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것은 허무가 아니지, 창문 밖 지나가는 새벽 첫 버스를 바라보는 기분에 가까웠다.

곧 동이 터 오를 거고.


달빛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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