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자상한 합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앳된 근무자가 그릇을 깨었다. 뭐 잠시동안 찾아온 정적, 놀란 사슴 눈들이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아주 최악의 하루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때 위치를 알 수 없는 테이블에서 들린 한마디가 있다.
'알바가 그릇을 깨네 오늘 장사 잘 되시겠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내가 대학시절에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불행을 마주한 사람에게 건네는 인류의 가장 따듯한 거짓말이자 '자상한 합의'를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들어본 인류가 고안해낸 심리적 안전그물 사전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사실 인류 인류 하지만 결국 한국어로 된 속담이기에 이게 한국인들의 자상한 합의인지도 모르겠다.
1. 알바생이 그릇을 깨면 그낭 매출은 대박이 난다.
-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실수는 유독 뼈아프다. 당황해서 어절 줄 모르는 어린 알바생의 미안함과, 깨진 그릇 값을 감당해야 하는 주인의 속상함을 미래의 행운으로 맞바꾸는 합의다. 날카로운 파편 앞에서 화를 내는 대신 "야, 오늘 장사 잘 되려나 보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 공간의 공기는 질책이 아닌 축제로 변한다.
2. 옛말에 집에 불이나면 부자 된다 뭐 귀신이 없다던가 어쨋던가
- 모든 것을 태워버린 화마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인류는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완전한 정화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나쁜 기운까지 다 타버렸으니 이제 깨끗한 복만 들어올 것"이라는 이 합의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에게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라고 등을 떠밀어주는 가장 강력한 재기의 주문이다.
3.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 된다
- 짐은 젖고 몸은 고된 최악의 이삿날, 서로를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늘이 내려주는 축복의 비"라고 믿어버리는 합의이다. 눅눅한 이삿짐 박스 사이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격언이다.
4.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
-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자상한 합의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공포에 젖지 않도록 만든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약속이다. 보이지 않는 사후세계를 '꽃밭'이나 '천국'으로 설정함으로써, 우리는 상실의 고통을 '잠시 동안의 이별'로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5. 첫눈 올 때 고백하면 이루어진다
-첫눈은 사실 교통을 마비시키고 신발을 젖게 하는 불편한 기상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 찰나의 순간에 사랑 고백 타이밍 티켓을 부여했다. 고백의 두려움을 눈의 낭만 뒤로 숨겨주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연인들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며 등을 떠밀어주는 로맨틱한 약속되게 한다.
6. 무릎이 쑤시면 비가 온다
-몸이 약해진 어르신들의 통증을 단순한 '노화'로 치부해 서럽게 만드는 대신, '기상 예보관'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는 합의이다. "아이고, 할머니 무릎이 정확하시네요"라는 말 한마디가 노년의 상실감을 '쓸모 있는 지혜'로 바꿔놓는 마법을 부리게 된다.
7. 아이들은 아픈 만큼 큰다
-어린 생명이 열이 나고 앓을 때,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합의이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믿음으로써,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주고 아이의 고통을 대견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8. 이름값 하느라 그래
-유독 삶이 파란만장하거나 고단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멋진 이름이나 큰 포부를 빌려 위로하는 합의다. "네 이름이 워낙 귀하고 커서, 그 무게를 견디느라 지금 잠시 힘든 거야"라고 말해준다. 고통을 '이유 없는 불행'이 아니라 '거물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 의례'로 격상시켜주는 다정한 속임수다.
9. 액운은 한꺼번에 온다 (삼재)
-안 좋은 일이 연달아 터지면 "내가 뭘 잘못했나" 자책하기 쉽다. 그때 인류는 '삼재'라는 시스템을 이용한다. "네 탓이 아니라 지금이 그냥 그럴 시기야. 3년만 버티면 다 지나가"라고 말해주며 개인의 책임감을 덜어주고, '버텨낼 기한'을 정해주는 자상한 방어기제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세상은 참 명확해졌다.
알바생이 그릇을 깨면 매출이 대박 나는 게 아니라 그냥 기회비용의 손실이고,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가구에 곰팡이가 필 확률만 올라간다. 죽음 뒤엔 '좋은 곳' 대신 '무(無)'가 기다린다는 생물학적 진단이 내려지고, 손 없는 날을 따지는 건 그저 이삿짐 센터의 대목 장사일 뿐이라고 치부된다.
모든 것에 데이터가 붙고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참 편리하고 합리적인데, 나는 가끔 먹먹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이라고 바보였을까? 그릇 파편을 치우며 "대박 나겠다"라고 외칠 때, 그들도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거다. 불난 집 터가 명당이라 집값이 보전된다는 말도, 실은 전 재산을 잃고 길바닥에 앉은 이웃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게 하려는 인류의 '눈물겨운 억지'였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이 말도 안 되는 속담과 격언들은 사실 과학이 아니라 사회적 심폐소생술이었다. 절망이라는 질식 상태에 빠진 사람의 가슴을 압박해서, 다시 숨을 쉬게 하려는 인류 공통의 자상한 합의였던 셈이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지만, 상처를 어루만지지는 못한다. 시험에 떨어진 아이에게 "네 노력 부족이야"라는 정답을 말하는 과학보다, "미역국 먹어서 미끄러진 거야, 다음에 고기 먹고 붙자"라고 말해주는 그 '다정한 거짓말'이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효율과 증명이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나는 여전히 인류가 쌓아온 이 낡고 비과학적인 합의들을 사랑한다. 텅 빈 논리보다 꽉 찬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서로의 불행 앞에서 "액땜했다 쳐"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 여유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