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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Feb 20. 2021

끄적끄적

이력서

며칠 전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외국계 회사 이직을 제안했다. 회사 이름이 익숙하다. 내가 쓰는 장비를 만드는 회사다. 연락 온 것도 신기하다. 내가 해당 후보자라는 것에 잠시 어깨가 올라갔다.


영문 이력서를 찾았다. 미리 준비해 둔 습관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이력서는 18년 동안 제대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무려 18년 동안 말이다. 준비만 열심히 했지 실제로 이직은 안 했다는 의미다. 근데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헤드헌터의 이직 제안이다.


최근 작성한 이력서를 찾았다. 쓸데없는 말이 없어지고 간략하고 간소해졌다. 그래도 분량이 많다. 경력이 쌓여서 그런가 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다.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공부해서 더욱 발전시켜 논문도 쓰고, 공부한 게 아까워 강의도 나가고, 성격상 대외활동과 봉사도 열심히 한 내 삶의 발자취.


이력서를 찢어버렸다. 과거에 연연하는 것 같았다. 삶의 발자취가 어쩌고 저쩌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듯해서 재수 없었다. 다 필요 없이 느껴졌다. 이직할 마음이 있었으면 예전에 이미 했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쉽게 결정할 나이가 아니라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할게 너무 많아졌다. 내 나이, 가족, 거주지, 연봉, 연금, 업무, 발전 가능성, 안정성 등. 그래서 이력서를 찢어버렸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열심히 살아온 과거는 군더더기 없이 한 줄 또는 한 단어로 축약해야 한다. 애매한 거는 쓰지도 말아야 한다. 나의 장점과 단점은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솔직해지면 쓸게 없을 수도 있다. 그 반대라면 참 좋을지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20대, 

텅 빈 내 주머니와 머리를 채우기 위한 30대, 

과거와 현재를 저울질하는 나의 미래를 고민하는 40대

백지로 시작해 보자. 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고민하자. 조각난 이력서를 다시 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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