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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Mar 19. 2019

멋진 화폭에 새겨진 말씀

# 김함겸 교수님 감사합니다.

새벽 1시, 지인과 인사 후 택시에 올라탔다.

출발 후 1분도 채 안되어서 기사님은 내게 질문한다.

"선생님이세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답변을 한다.

"네... 네"

"무슨 전공 교수세요?"

나는 순간 당황하며 다시 되물었다.

"네 뭐. 교수는 아니고요.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신 것 같은데 뭔가요?"

"제 느낌상 병원 쪽에 계시는 분 같은데. 맞나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분 뭐지? 내 몸에 뭐가 붙어 있나?' 그러나 그런 의심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였다. 어느 순간 작은 공간은 암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최근 전이암을 막을 수 있는 연구결과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고 있었다. 왠지 작은 토론 시간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야밤 택시 토크>를 한 것이다. 집에 도착했다.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웬만한 전공 학생보다 질문의 요점이 깊네요. 감사합니다. 운전 조심히 하시고,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택시라는 작은 공간에서 질문과 답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분은 호기심 많으신 분 같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질문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야밤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암은 정말 치료할 수 있나요? 환자한테 잘해 주세요.




오늘은 모교 교수님의 퇴임식이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동문들이 많이 참석했다. 작은 동문회 모임 같다. 중년에 나이가 된 동기도 눈에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와 후배에게 안부 인사를 나눈다. 모두가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인사로 또 한 번 인사를 나눈다. 저 멀리 주인공이 보인다. 동문들의 축하와 안부로 불러 싸인 교수님을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분의 심정은 어떨까?'


상상할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온화한 얼굴 속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기분이랄까. 잠시만의 재회와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하는 자리라서 그런지 모른다.  


교수님은 평소와 같다. 오감으로 느낀다.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느껴진다. 제자에 대한 걱정과 칭찬과 격려. 더 이상 수업은 없다. 마지막 수업에 큼지막한 교실에서 나는 느낀다. 따스한 바람 하나가 수많은 피부 속 세포를 요동치게 한다. 아주 미세한 잔상은 뇌 속 어딘지 모를 곳에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내 나이 20살이다. 나의 뇌 속에 잔상으로 남은 수많은 세포의 요동들이 연결 또 연결된다. 짧은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고 안개처럼 흘러가고 있다. 안개는 이내 무지개처럼 화사한 꽃 잎으로 변하고, 따스한 겨울에 부드럽게 떨어지는 눈꽃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다. 바람 하나가 불 때마다 알록달록한 작은 눈꽃은 도망치듯 희미하게 멀어져 간다.


22년 전, 내 심장은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다. 어색한 공간 속에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과 함께 교실에 앉아있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점잖은 양복차림의 신사 한 분이 자연스럽고 가벼운 솜털처럼 교실로 들어온다. 주위를 쭈욱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그때 그 시간과 공간에서 나와 낯선 이들은 김함겸 교수님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내게 대학생활은 그저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실험과 경험이 공존했다. 대학 1학년에는 공부보다는 고민, 밥보다는 술, 사랑보다는 동아리, 전공보다는 영화에 미쳤던 시기였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나는 즐겨야 한다는 권리의식을 충분히 충전하고 다녔다. 그러나 학점은 별로였다. 목사와 언쟁해서 F학점을 모면하지 못해 학점은 1점대였다. 공부 외 다른 활동은 정말 잘했다. 주말마다 산에 올라가거나 인공 암벽등반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심심해할 여름에는 영화에 빠졌다.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16 mm 비디오테이프와 아날로그식 카메라는 들고 다니며 예술이 뭔지 알고 싶어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옆 집 간호과 학생에게 마음이 뺏겼다. 한 동안 짝사랑에 몸살을 앓았다. 술 먹을 돈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에 전념했다. 용돈을 벌었다. 또다시 미래를 고민하며 술에 빠졌다.  


군대 가기 전 1년은 그야말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그 중심에는 교수님이 계셨다. 매 번 정신 차리지 못한 몸과 마음이 전부였다. 교수님 방 작은 소파는 내게 작은 안식처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면 그렇게 편안했다. 그것도 교수님 앞에서 말이다. 간혹 교수님이 수업에 가시면 방을 지키겠다는 아주 당돌한 핑계로 소파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려움 없는 신입생'인 것이다. 그런 나를 교수님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특별한 잔소리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지내다가 군대에 갔고, 다시 복학해서 똑같았다. 1학년 때와 다른 점은 하나 있었다.


군대 있는 것보다 공부가 쉽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땅 파고, 얼차려 받고, 총 쏘고, 흙탕물에서 구르고 간혹 실탄 장전과 수류탄을 남발하고픈 충동이 극심한 그곳 말이다. 공부는 정말 쉬운 거다. 군 시절 이후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시간이 아깝고, 무엇인가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대학시절 공부에 전념했지만, 정작 전공과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다. 내 학점이 별로라서 그렇다. 열정만 있다고 모든 걸 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절에 학점, 직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꽤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남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 하나가  '증권 분석사' 시험이었다. 하라는 국시 공부는 하지 않고 금융 공부를 한 것이다. 사실 밤잠도 안 자고 이런저런 많을 것을 소화했던 것 같다. 주 빼고 하루 3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이건 분명하다. 정말 주간에는 하고 싶은 걸 했다. 그 대신 새벽에 전공 공부를 한 것이다. 새벽에는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열심히 전공 공부를 한 보람은 나중에 졸업에서 여지없이 나타났다. 국시 합격률이 매우 저조할 때 합격한 것이다. 이런 나의 생활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수님은 아마 그런 나를 모르셨을 것이다. 그런 나를 지켜본 분도 교수님이라 생각한다. 국 준비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혼내고 싶어 하셨을까. 그래도 묵묵히 지켜봐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대학 시절 내내 교수님께 걱정만 안겨 드린 것 같다. 다행이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잘 나간다. 여기서 '잘 나간다'는 내가 하고 싶은걸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다. 여하튼 교수님 걱정과 다르게 문제없이 지금까지 오게 되어서 또한 함께 세월을 걷게 되어서 감사하다.


무슨 길이든 걷다 보면 수많은 고민과 선택은 존재한다. 지금 내가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람 또한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 교수님의 조언은 중요한 순간 소중한 빛과 같았다. 무슨 선택을 하든지 기준이 중요하다. 소위 <나만의 개똥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잡고 걸어가는 길에 무심코 다른 길을 가더라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수님의 가르침과 조언 한 마디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해 주었다. 고민에 빠지고 상념에 젖어 있을 때면 나는 기억하고 메모한 조언들을 다시 재구성하게 된다. <나만의 개똥철학>에 양념을 뿌려가며 맛의 풍미를 높게 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때론 누군가의 철학을 모방하고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밋밋한 맛과 향기를 풍부하고 감동적이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맛에 매료되어 교수님의 조언을 찾아본다. 교육에 관한 교수님의 철학을 끄집어 읊어본다.


학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성적평가에 객관성을 잃지 마라.
불필요한 술자리는 조심해라.
교수는 외강이든 전임이든 강의가 최우선이다.


여기에 <나만의 개똥철학>를 추가해 본다.


알아가는 재미, 가리키는 재미를 즐기자.
즐거운 상상으로 연구하자.
남과 비교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자.
또 겸손하고, 항상 겸손하자.


22년 동안 수많은 단편 영화가 제작되었다. 상영 시간이 짧은 것도 있다. 다소 길고 지루한 것도 있다.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다.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교수님과 함께한 영화 속에는 단 한 번도 같은 장면은 없다. 또한 주연, 조연, 엑스트라 구분 없이 영화 속에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수많은 단편 영화에서 클라이맥스 장면에 교수님과 함께해서 너무 영광이고 감사하다. 1997년 여름이 기억난다. 그 좁은 공간을 우리는 "영화관"이라 부르고, 자체 제작한 단편 영화를 교수님과 함께 관람한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자막이 보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다소 상기된 감독, 졸려하는 동아리 회장, 뭔가 생각에 빠진 엑스트라, 강제로 온 걸 후회하는 여학생들, 빨리 끝나고 술 먹고 싶어 하는 친구 녀석들. 그 속에서 조용히 손뼉 치는 한 분을 보았다.



김함겸 교수님. 감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동기와 후배가 교수님과 함께 작은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름답다. - 촬영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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