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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Jul 31. 2019

사진 한 장

Good luck~

20주년 기념사진 한 장에 많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 싶은 얼굴, 최근 술자리에서 마주친 얼굴, 언젠가 보게 될 얼굴 등. 오늘따라 사진 속 한 장면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숫자 20에 내가 포함된 숫자는 8이다. 석사에서 박사까지 8년이라는 숫자가 20주년 안에 고스란히 한 조각으로 존재했다. 아쉽게도 사진 속에 내 얼굴은 존재하지 않지만, 왠지 뿌듯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짧지만 긴 시간 동안, 한 순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다. 사진과 함께 지난 기억 속에 어느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늘 끝나고 어디로 갈까? 배고프다. 내가 저녁 사줄게. 빨리 정리하고 나가자.”

늦은 저녁이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각자 연구실에서 논문을 보며 고뇌하고 있는 동생들에게 말했다. 내 한 마디에 하나같이 고민하는 눈치다. 논문은 봐야 하고 연구는 해야 할 텐데. 옆에 키 크고 배고파하는 깡마른 형님께서 소주 한 잔 하자고 유혹하고 있으니, 잠시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중 어느 누군가 논문을 정리하며 나를 바라본다.

“가시죠. 형님. 오늘 머리도 아픈다. 소주 한 잔 하시죠.”

그 말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동생들도 하나 둘 책상을 정리하며 일어선다. 괜히 공부하는데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도 잠시, 모두들 얼굴빛이 환해지며 가방을 메고 있었다. 모두들 할 일도 많고 수업에 연구에 지쳐있지만,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이겠지.라는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나는 지갑을 만지작 거리며 재촉했다. 오늘은 동생들과 소주 한 잔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보통 우리들의 대화 연구 주제 시작해 깊은 한 숨으로 끝난다. 그날도 마찬가지다.

“형님은 요새 논문 쓰세요?”

“나? 음… 이미 하나 썼고, 뭐 할까. 고민 중. 현재는 논문 리뷰 중이야.”

“와. 대단하세요. 저는 논문 주제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역시, 임상에 계시니 연구할 주제가 바로 있으시니 부럽습니다.”

“아니 뭐. 생각하는 건 많은데 실속 없이 이것저것 보는 중이야.”

“저희는 맨날 연구실 구석에서 논문 보면서 뭘 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워낙 임상에서 실험하기가 어려워서 쉽지가 않네요.”

“그렇지. 기관에서 허락받는 것도 어렵고, 장비 사용하는 것도 눈치 보이고. 사실 나도 실험하기 쉽지 않은데. 저희들은 오죽할까.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

“아니에요. 이렇게 저녁도 사주시고, 연구할 것도 상의할 수 있으니 좋아요.”

“내가 저녁 사준다고 안 했는데. 웃기고 있네. 나 돈 안 가져왔어. 여기 술값은 외상으로 하자.”

순간 동생들이 웃으며 말한다. “저희가 돈 벌어서 꼭 사드릴게요.”

“좋아. 기대하겠어. 한 잔 하자.”


동생들의 그늘진 얼굴과 감춰진 작은 희망이 느껴진다.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연구결과에 의기소침한 모습과 그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직한 마음을 읽는다. 나는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각자의 미래를 상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은 직장인인 내게는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젊은 동생들의 열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방법을 잘 모르기에 일단, 굶주린 사자들에게 고기를 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정말 <연구>라는 한 단어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 같다. 저녁을 먹으며 함께 이야기하던 연구 주제들이 빛을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서랍에 고이 모셔둔 연구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것만으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젊은 연애 이야기보다 연구 이야기가 재미있던 때.


술 한잔을 목구멍 깊은 곳에 흘려보내며, 각자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따라 갑자기 10년 후가 궁금해지는 건 왜일까?

“우리말이야. 10년 후면 어떻게 될까? 모두들 연구소나 임상에서 연구하거나 일하겠지? 어떻게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하는 것도 벅차고 힘들어 죽을 맛인데. 10년 후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없죠.”

술 한 잔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 떨쳐 버리는 마법 같은 존재다. 하나같이 미래에 대한 부정보다 할 수 있다는 긍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또한 마법은 지친 일상을 재설정해 주는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다만 지하철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부작용은 감안해야 했다.


옆에 있던 동생이 술 한잔을 마시며 말한다.

“형님은 10년 후 어떤 모습일까요?”

“나? 글쎄, 아마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직장을 옮길 수도 있겠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워낙 이직할 마음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서. 이게 최대의 문제야. 사람이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순진한 건지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건지. 나도 너희들처럼 고민이야. 다만 나는 직장인이고 나이도 있어서 내 맘대로 하는 게 쉽지가 않네.”

사실 가정도 있고 임상경험도 있는 이 시점에서, 공부한다고 시간도 돈도 많이 쓰고 있는 지경인지라 이혼이나 안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은 결혼하지 않은 어린 동생들에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앞에 놓인 달콤한 소주 한 잔을 마셨다.


모두들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본다. 실험하고 연구하고 밤새 논문을 작성한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연구를 국내 혹은 해외에서 발표하게 된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나 또한 그들의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후회 없는 연구생활을 함께했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20주년 기념사진은 벌써 2년 전의 빛바랜 사진처럼 과거가 되었지만, 그 속에 담긴 모습은 그날의 술 한잔에 묻어둔 10년 후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문도 함께 묻어있다. 간혹, 여러 매체를 통해 소식 듣는다. 누구는 연구소에 갔다. 누구는 임상에서 열심히 바닥부터 배우고 있다. 누구는 이미 직장인의 서러움을 경험하고 있다. 누구는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등등 소소한 이야기와 함께 듣게 된다. 불안한 미래를 10년까지 길게 볼 필요가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불안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는 걸 새삼 느낀다. 모두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자 하는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잘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될 것이다.


사진 속 교수님의 모습과 함께 연구 주제를 안주삼아 고민했던 얼굴 표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앞을 보고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이미 정해진 미래라면 호기심은 없을 테다. 연구자는 호기심이 많아야 하고, 끈질긴 근성도 필요하다고 했다. 교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분명 정석이다. 무엇인가 희미하지만 보일 것 같은 긍정은 우리들을 책상 앞으로 이끌어 준다.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과 같은 연구생활은 학위가 끝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 일지 모른다.


퇴근길, 문득 이 한 장의 사진이 내 깊은 내면에 숨겨진 <연구>라는 단어를 상기시켜준다. 회피하고 싶고 버리고 싶은 단어가 오늘따라 메아리처럼 들린다. ‘왜 해야 하냐’라는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마저 들게 한다. 내 책상에는 아직도 전공책이며 프린트한 논문들이 좀비처럼 널브러져 있다. 눈으로 그 녀석들을 힐끗 쳐다볼 뿐 감히 그들의 심오한 에너지를 들출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과정에 쏟아부어야 할 에너지의 양을 짐작할 수 있어서다.


사진 속 누군가 자꾸 소리치는 듯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슴 한편에 박아둔 채 하루 종일 메아리치는 그 단어. 질문을 받았으면 답을 해야 한다. 이제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 습관화된 내 모습을 볼 때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왜>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발견하며 희열을 느끼고 싶다. 사진 속 누군가 내게 주술을 부리는 것 같다.


“정박사. 소처럼 정진하세요.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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