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실, 너의 낭만
낭만 (浪漫) :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근데, 낭만파 음악을 듣다 보면, 제가 생각하는 분위기랑 다른 경우가 많아요. 생각보다 어두운 곡이 많더라고요."
피아노를 오랫동안 치셨던 선배와 피아노곡들을 함께 듣다가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이었다. 돌아온 선배의 답은 나에게 큰 울림과 깨달음을 줬다.
"그건 그냥 개개인의 낭만인 거 같아. 그 어두운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낭만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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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을 맞아 고향에 계신 엄마를 보러 갔다. 나를 맞이한 건 현관문에 붙어있는 앙증맞은 단풍잎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지금의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엄마의 낭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들어서니 마주한 벽지에도 단풍잎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화장실 문에도, 거실에도, 안방에도.
스치듯 지나가버린 지난가을. 그 가을을 훔쳐간 범인이 여기 있었구나.
고향에 있는 집을 방문하면, 곳곳에 스며 있는 엄마의 낭만들이 나를 감싸며 고단했던 몸과 마음을 낭낭하게 축여준다. 거실의 큰 창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엄마가 애정하는 식물들이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옆에 놓인 소파, 그리고 그 소파 옆에 자리한 책장. 책장 맨 아래에는 색 바랜 녹음테이프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와 내가 만나기 전, 어느 감성적인 소녀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들을 녹음해 둔 테이프들이었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그중 몇몇을 재생시켜 보았다. 바래진 시간과 선명한 시간이 맞물려 간신히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신선하면서도 편안하게 내게 다가왔다.
"재희야 일로 와봐. 보여줄 거 있어."
나긋하게 피어오른 엄마의 사랑스러움에 이끌려, 나는 주방 한편에 놓인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하늘을 향해 두 조각의 하트를 번쩍 들고 있는 식물이 있었다.
"우와... 하트 모양으로 잎이 났네?!? 이쁘다......"
하트 모양의 잎사귀들. 그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이웃 아파트들의 정경.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그림처럼 차분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생명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그 정취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왔다.
줄곧 마르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스러움.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그것은 낭만이었고, 여전히 낭만이다. 눅진하면서도 보송한 파우더 향이 가득 담긴 엄마의 포근한 감성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내게 심어준 그 낭만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샘물처럼 흐른다. 음식에서, 제철을 입은 공기 속에서, 산과 바다의 넓은 품 속에서, 책과 글에서, 노래에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 시절, 엄마의 낭만을 누리는 복을 지니며 살아간다.
과학, 기술, 그리고 공학.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내는 과학도들이 꿈을 펼쳐나가는 공간. 내가 매일을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는, 그런 엄마의 낭만을 간직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시내에서 이 공간을 들어오는 길, 메타쉐콰이어가 길게 늘어선 그곳. 제철 음식을 즐기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그 길은 계절의 선물을 여과 없이 내어준다. 메타쉐콰이어만이 지닌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모습. 그 고유의 우듬지는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름에는 풀 향기 가득한 생동감을, 가을에는 눅진한 금빛 황홀함을.
지난가을,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기 위해 시내로 나가던 날이었다.
“자, 여러분, 이제 단풍길이 펼쳐집니다~”
메타쉐콰이어 길에 들어서기 전,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설렘에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탄성이었다.
"어? 진짜 단풍이 피었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가을 옷을 입은 메타쉐콰이어 길을 그제야 알아챘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자차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모두. 머쓱해진 마음에, 나도 모르게 펼쳤던 낭만을 조용히 되돌려 놓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절제된 낭만은 방심한 틈을 타 흘러나온다. 그렇게 펼쳐진 내 낭만, 어쩌면 엉뚱함에 사람들은 퍽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곤 한다. 그냥 나는... 둥근 보름달을 보면 크림이 잔뜩 든 크림빵이 떠오르고,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비빔밥처럼 엉망이 된 상태라고 말하게 된다. 초록빛을 띤 바다를 보면, 쌉싸름하면서도 낭낭한 녹차라떼가 떠오른다.
사실을 파고드는 과학도들은(물론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나를 4차원, 창의적, 엉뚱함, 귀여움과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니까 어쩌면 그런가 보다 싶다.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제는 그런 내가 바로 나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을 찾아 나서는 데 지친 사람들은 되려 나와 대화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낭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워지고 만다.
그 굶주림에, 오랜 고향 친구들을 만날 때면 절제 없이 감성이 흘러나온다. 지난가을, 고향 친구와 단풍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언제나 정이 많고 따뜻하며 유쾌하다. 그동안 여러 일들을 겪었던 친구라, 세상이 돌아가는 실태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 친구의 현실적인 조언과 걱정들은 다 나에게 피와 살이 되는 내용들이라, 고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털어놓게 된다. 겪은 삶의 현실이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저 소소한 낭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통하는 우리다. 그렇게 우리의 단풍놀이도 감성이 가득한 여행이었다.
"진짜 항상 느끼는 건데... 넌 언제 봐도, 그냥 그대로야. 어릴 때랑…"
그 친구는 내가 옆에 있으면 어제 만난 것처럼 늘 편안하다고 말한다.
"근데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현실에서는 긴장이 풀어져서 실수할 것 같거든."
현실…
사람들에게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나는 현실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인가? 그들이 정의 내리는 현실이 어떤 결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게 맞다. 나는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인 걸까?
사랑을 하게 되면 삶은 자연스레 비유가 된다.
하지만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을 바라보면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을 함께 찾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내 세상의 안과 밖을 떠돌다 보니, 참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는 생각이 거칠게, 쓸쓸하게, 조금씩 덤덤하게 마음에 들어앉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뿐인 삶을 낭만적으로 살아가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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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냥 개개인의 낭만인 거 같아. 그 어두운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낭만인거지."
내가 낭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낭만이 될 수 있을까?
낭만 (浪漫) :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현실 (現實) :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
현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현실적이라고 했을 때, 나는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연스레 자본주의, 돈, 생계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들 중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본주의도 돈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적 가치, 믿음이자 약속에 불과한 것 아닌가.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 낭만이라면... 돈을 좇는, 자본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역시 낭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메타세쿼이아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 실험을 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일상에서도 연구할 거리들을 찾아 나선다. 함께 연구하는 박사님, 밤낮 새벽 없이 연구실에서 마주치곤 하는 그 박사님이 떠오른다. 연구 얘기를 할 때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알아낸 바와 알아내지 못한 바에 대해 줄줄이 얘기하던 열정. 그 박사님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낭만이 아닐까?
함께 단풍 여행을 떠났던 친구는 최근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여러 일들을 경험하며 자신이 음식과 빵을 만드는 일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만든 빵을 전해줄 때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은 명장이 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경험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 그 친구에게는 빵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달해 주는 것이 낭만이 아닐까? 그 친구가 만든 빵을 통해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것은, 그 친구가 새롭게 열어 나갈 세계니 말이다.
나에게는 서서히 세상이 사랑 가득한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낭만이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각자가 지닌 낭만이 다를 뿐, 모두들 자신의 낭만을 지켜나가고 또는 이루어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한 발자국씩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만의 비유로 각자의 세상을 색칠하면서. 그것이 사랑 아닐까?
작년 이맘때 서울에 자리한 LP 바에서 낭만의 삶을 사시는 분을 만났다. 외진 곳에 자리한 멤버십을 가진 손님들만 받는 LP 바였다. 손님을 받지 않을 거 같은 분위기에 압도돼, 친구와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후한 나이대의 사장님께서는 우리를 좋게 보셨고, 멤버십 회원이 아님에도 LP 바를 열어주셨다. 그 밤 동안, 사장님을 포함한 우리 세 명은 오랫동안 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LP 음악들을 즐겼다.
"꿈을 꾸면서 살아가다 보니, 나중에는 결국 그 꿈을 하고 있더라고."
이십 대 젊은 시절, 사장님은 자신의 LP 바를 열고자 하는 꿈을 가지셨다. 그렇게 한 장씩 LP판을 모으고,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공간을 자신이 꿈꾸는 것들로 채워 가다 보니 LP 바를 운영하게 되셨다. 나는 박사과정을 밞고 있지만, 그분이 진정한 연구자이자 박사가 아니신가 리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기 있는 LP들은 다 처분하고,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남은 인생 살아보려고."
덤덤한 사장님의 말속에서 꿈꾸는 자가 가진 낭만, 그리고 그 낭만을 좇아가는 제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트럼프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워런 버핏에겐 돈이 최우선 가치가 아니다. 그의 중요한 가치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은 IT기업, 우주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한 일론머스크가 떠오른다. 옛 유럽의 개척자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더 넓은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항해를 떠났다. 우리는 보편적인 존재이지만 독자성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낭만이 있는 것이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마음의 창을 닫지 않을 것.
나의 낭만을 잃지 않을 것.
나의 낭만만을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의 낭만을 빼앗거나 무시하시 않을 것.
다른 사람들이 낭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함께 해줄 것.
서로의 낭만을 존중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
그렇게 나는 낭만을 대하고 싶다. 나의 현실이 누군가에게는 낭만일 수 있다.
여하 간에 나는 집안 곳곳에 붙어있던 어설픈 낙엽들이 참 맘에 든다. 제 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삶이 좋다.
"너희 고향에 있는 바다는 무슨 색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는 사랑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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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지쳐 낭만이 고개 숙이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낭만고양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고개는 다시 내 삶을 향한다.
낭만고양이 (체리필터)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두 번 다신
생선 가겐 털지 않아.
서럽게 울던 날들,
나는 외톨이라네.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 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
깊은 바다
자유롭게 날던 내가
한없이 밑으로만
가라앉고 있는데.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 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