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 Dolnick | The New York Times July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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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틴 친은 혼자였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떠올렸고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을 곱씹었다.
아내랑 딸과 자주 가던 차이나타운의 식당, 초등학교에 딸을 내려주던 일상, 퀸스의 친절한 이웃들. 그가 안락하게 누리던 중산층의 삶을 보여주던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전직 공무원인 친씨는 그의 도시를 새롭게 배워야 했다. 도저히 믿을 수는 없지만, 노숙자로서 말이다.
2012년의 그날 저녁, 이스트 윌리엄스버그 바버라 클레이만 노숙인 쉼터에는 다른 중국인이 딱 한 명 더 있었다. 마른 체구의 이 남자 몸에는 헐렁해 잘 맞지도 않는 옷이 걸쳐 있었다. 친씨는 전문가의 안목을 발휘해 그 남자를 살펴봤다. 이민자, 아마도 푸젠성 출신일 것으로 보인다. 가족은 없고, 영어도 못 하고, 불법체류자다.
"나는 완전 바닥에 있었습니다." 친씨는 그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봤다. "하지만 그 남자보다는 나았어요."
남자의 이름은 모 린. 친씨는 그들이 몇 년만 더 일찍 만났다면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를 좋아하긴 힘들었죠,"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쉼터에 있던 중국인은 우리 둘뿐이었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친씨에겐 철저하게 감춘 비밀이 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범죄 기록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 비밀은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새로 알게 된 이 남자에겐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나마 말했을 뿐이다. 홍콩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랐고, 노숙자가 된 건 최근의 일이라고.
린씨는 머뭇거리며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가 뉴욕에서 보낸 몇 년을 설명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는 실제로 서류미비자였고, 차이나타운의 수많은 주방에서 일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안정적인 일을 찾을 수 없어 그의 실제 나이 46세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그는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을 어슬렁거리고, 인도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푸젠성(福建省) 커뮤니티센터에서 지직거리는 TV를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 남자들은 곧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쉼터에선 항상 수다를 떨었고, 시내로 나가 거리를 걸었으며, 국수를 나눠 먹었다. 주위에선 그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어요." 그들과 시간을 보냈던 브루클린 푸드뱅크의 책임자 미레일 마삭이 말했다. "그는 린씨를 돌봤는데, 린씨에게 뭔가 필요하면 친씨를 통하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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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규정은 모든 사람이 오전 8시면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친씨와 린씨는 하루를 보낼 루틴을 만들었다. 그들은 딤섬과 만두를 살 수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함께 향했다. 여기서 친씨가 매달 공공보조금으로 받는 200달러로 감당할 만한 음식들을 사 먹었다. 린씨가 가장 좋아하던 식사는 맥도날드에서 파는 피시버거였다. 린씨는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아 부드럽게 저민 생선 살이 씹기 수월했다.
종종 차이나타운 가장자리에 있는 녹음이 우거진 공원에서 식사를 했다. 벤치에 함께 앉아 이웃들을 둘러봤다. 가끔은 도서관에 갔다. 친씨는 친구에게 인터넷 쓰는 법과 유튜브에 대해 알려줬다. 린씨는 옛 중국 영화에 빠졌다.
삶을 방황하던 친씨는 새 친구를 돕는다는 새로운 목표 의식이 생겨났다. "여기서 '백기사' 역할을 맡게 된 셈이죠." 친씨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백기사'가 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린씨가 뉴욕을 거의 둘러보지 않았던 걸 알게 됐다. 친씨는 개인 여행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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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날, 그들은 미드타운에 있는 메이시스 백화점에 산타클로스를 보러 갔다.
중년 노숙인 두 사람은 아이들이 몰려든 가운데 우뚝 서 줄을 섰다. 부모들이 옆에서 그들을 흘겨보아도, 친씨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마침내 사진을 찍기 위해 산타 앞에 섰다. 친씨는 산타의 오른쪽에 활짝 웃으며 앉았다. 다른 쪽엔 린씨가 조금 뻣뻣한 자세로 무릎에 손을 깍지 낀 채 앉았다. 린씨는 두툼한 패딩을 목까지 잠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친씨는 친구의 소원을 산타에게 통역해주었다. ‘그린카드(영주권)’.
그 후 2년 동안 이들은 노숙인 쉼터에서의 삶에 적응해갔다. 쉼터에는 여러 사람이 들고 나갔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의 자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무렵 린씨는 누군가 공원 벤치에 두고 간 오래된 스마트폰을 주웠다. 밤에 침대에 있을 때 그는 친씨 스마트폰의 '핫스팟' 기능에 연결해 온라인에 접속했고, 오래된 영화를 보았다.
쉼터에서 폭력과 강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친씨가 '터프가이'처럼 행동해 관심을 돌렸다. 그런데 2014년 8월1일 오후 11시 무렵, 친씨는 쉼터 관계자와 이야기하고 린씨는 그의 자리에서 자고 있을 때였다. 체포 전력이 있던 쉼터 수용자 한 사람이 린씨에게 달려들어 피떡이 되도록 그를 때렸다. 친씨가 그 친구를 발견했을 땐, 린씨의 왼쪽 눈은 피멍이 들어 감겨 있었고, 입은 상처 난 채 벌어졌으며,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친씨는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하는 동안 린씨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린씨는 안면 골절로 수술이 필요했다. 친씨는 그의 옆에 섰고,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흥분한 모습을 겨우 참고 있었다.
"린! 100년에 한 번 오는 기회야! 바로 이거야!" 친씨는 그의 친구가 이해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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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씨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1990년대 초, 친씨는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출입국 담당자로 일했다. 그의 일은 중국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난민 신청을 한 중국인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친씨의 아버지나 린씨 같은 사람들이다.
친씨는 그곳에서 5년쯤 일했다. 천안문사태 이후 이민자들이 급증하던 때였다. 매일 밤 친씨는 모진 박해에 대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했고, 또 많은 이들은 과장되게 이야기했다. 친씨는 그의 부모들의 삶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자비를 구하며 줄을 선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친구가 구타당한 것을 보고 친씨는 특별한 종류의 비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U 비자였다. 범죄 피해를 본 이민자에게 주는 비자다. 친씨는 평소 이민법에 대해 살펴보던 무료 컴퓨터를 쓰기 위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2주 동안 몇 차례 확인 절차를 거친 뒤, 친씨는 차이나타운에서 이민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 T.J. 밀스에게 편지를 썼다.
"린씨에게 U비자를 적용할 수 있을지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친씨는 2014년 8월 13일 편지를 썼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틴 친으로부터."
친씨는 린씨나 밀스 변호사는 물론 누구에게도 이민국 경찰로 일했던 경력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내 과거는 추합니다." 그가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나를 더러운 경찰이라고 했죠."
1993년, 연방요원들은 친씨가 1700달러를 챙긴 것을 발견했다. 친씨는 출입국 일자리를 잃었다. 돈은 중국인 비즈니스맨에게서 챙긴 것이었다. 그 남자는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정치적 난민 신청을 했다. 친씨는 그에게 돈을 넘기지 않으면 중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몇 시간 뒤 연방 요원들은 친씨를 체포했고, 유죄 선고를 받아 거의 1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몇 년 지나 그는 또 체포됐다. 이번에 죄질이 더 좋지 않았다. 2003년, 그는 수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평생 모아온 돈을 가로챈 국제적인 사기 범죄의 총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친씨가 뉴욕 곳곳에 가짜 사무실을 두고 친척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길 원하는 이민자들에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친씨는 자신이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고, 인맥이 있어 큰 돈을 내면 비자나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친씨가 돈을 손에 쥔 뒤 사라져버렸고, 이름과 주소를 바꿔 같은 일을 계속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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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약 10만 달러를 챙긴 혐의를 받았다. 할머니, 농부, 재봉사, 그리고 그들의 남편들. 뉴욕에서 새 삶을 일구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이들이었다. 여러 증인들은 연방법원에서 증인으로 나서 그가 우두머리라고 지목했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 중 유일하게 교도소에 수감됐다.
지금까지 친씨는 자신이 누명을 받았고, 자신의 체포 전력 때문에 수사기관이 그를 지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누명을 벗겠다는 희망으로 그는 판사와 연방 관계자들에게 길고 긴 자필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약 10년 동안 수감됐다 지난 2012년 풀려났다. 그는 아내와 딸과 다시 함께 살길 원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노숙인 쉼터에서 지내야 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린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던 부처님이건 린을 돕기 위해 나를 보내준 거예요." 친씨는 말했다. "린은 불법체류 상태였고, 나는 전 출입국사무소 직원이었어요. 그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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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스 변호사와 다른 관계자들은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친씨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린에 대한 그의 헌신에 감탄했다. "친씨는 항상 린씨 옆에 있었습니다. 친씨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죠." 밀스 변호사가 말했다.
밀스 변호사는 린씨의 사례를 보면서, 친씨가 제시한 U비자 발급이 가능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U비자는 2000년에 미국에서 학대받아 고통받거나, 이런 상황에서 사법당국에 협조하고자 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밀스 변호사는 린씨를 위해 비자 신청 작업에 나섰다.
친씨가 중개인으로 나섰다. 밀스 변호사를 도와 폭행 사건의 경찰 기록을 확보하고, 부상 기록이 담긴 병원 문서도 찾았다. 수많은 신청서들도 처리했다. 밀스 변호사는 친씨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인내심과 이민법에 대한 유창함에 놀랐다.
"정말로 린씨에게 당신이 해준 것보다 더 잘해줄 수 있는 친구를 보지 못했습니다. " 밀스 변호사는 친씨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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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밀스 변호사를 위해 일하는 자원봉사자와 한 한 인터뷰에서, 린씨는 푸젠성 교외의 농촌에서 자란 이야기를 했다. 청년으로서 천안문사태를 보았고, 푸저우에서 자유와 개혁을 요구한 집회에 참여했다. 그러다 정부의 요주의 감시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체포가 두려웠고 그는 집을 떠나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힘든 여정을 시작했다.
동조자들의 도움과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그는 태국 국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착륙했을 때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확실할 수 있는 공항의 남자 화장실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는 여권을 찢어버리고 세관에 미리 외워둔 두 글자를 말했다. P.A. 정치적 망명(Political asylum.)
그는 임시 입국이 허가됐지만, 판사는 이후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그는 수년간 당국을 피해 숨어지내야 했다. 약간의 보수를 받고 힘든 일을 해야 했고, 발각될까 두려워했다. "주방에서 일을 구했고, 숙소와 빚, 아내를 위해 일할 수 있을 만큼 일했습니다." 린씨는 2019년 통역을 통해 이야기했다. "이 짓을 8년 동안 했고, 내 몸은 이제 감당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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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가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지만, 효과는 있었다. 2019년 4월2일, 그가 처음 미국에 온 지 28년 만에 비자를 받게 됐다. 그와 친씨가 자주 가던 차이나타운의 공원에 있었을 때, 친씨의 이메일로 서류가 도착했다. 린씨는 이메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린은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그에게서 본 적이 없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어요." 친씨가 기억했다. "린은 계속 비자 서류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비자를 받게 된 린씨는 치과에서 이를 치료하기가 더 쉬워졌다. 마침내 쉼터에서도 나올 수 있을 터였다. 3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면 그는 영주권 신청도 가능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아내 훠메이리를 뉴욕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린씨는 아내를 거의 30년 동안 보지 못했다.
"우린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습니다." 2019년 린씨가 비영리단체의 봉사자에게 한 말이다.
친씨는 수년간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친구의 인생을 바꿔주었다. 하지만 비자를 받고 몇 개월 뒤, 하루는 린씨가 친씨 앞에서 직접 질문을 던졌다. 너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었어?
공원에 있던 누군가가 린씨에게 귀띔해준 것이다. 린씨는 지금 알고 싶었다. 친씨가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은 아닌지. 친씨가 오래전에도 그를 위해 안전하게 비자 신청을 도울 수 있던 건 아니었는지.
친씨가 기억하기론,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금방 긴장이 흘렀다. "너는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친씨가 당시 린씨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네가 비자를 어떻게 받았다고 생각해. 나한테 고마워 해야지."
냉랭한 기운이 두 사람의 우정에 스며들었지만, 친씨는 결국 모두 흘려보냈다고 했다. 그들은 이후에도 함께 시간을 보냈고, 친씨는 린씨를 도와 도시를 살피고 의사와 치과의사를 찾는 일을 도와줬다.
그들을 셀 수 없는 끼니를 함께 나눴다. 이윽고 제3의 인물이 함께 그들과 함께 했다. 린씨의 아내가 뉴욕으로 왔다. 부부는 미국에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지 상상했다. 아내가 가족의 친구와 머무는 동안에도 린씨는 여전히 노숙인 쉼터에서 살았다. 린씨는 아파트에서 보내는 안정된 시간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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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친씨는 복통을 호소한 린씨를 데리고 벨뷰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하룻밤 보내게 한 뒤 린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도록 했다.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병원은 면회를 중단했지만, 친씨는 사회복지사에게 꾸준히 전화해 친구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다.
대화할 때 린씨는 힘 없이 나른해 보였다. 친씨는 걱정이 됐다. 몇 칠 뒤 병원에선 린씨가 코로나19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4월17일 저녁이었다. 친씨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기억했다. "병원이 전화할 만 일반적인 시간은 아니었죠." 그가 말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모 뱌오 린은 오후 8시33분 사망했다. 뉴욕의 첫 번째 코로나19 유행 당시 숨진 피해자였다.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그는 아내와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성년이 된 아들을 유족으로 남겼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연락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린씨는 펜실베이니아 공동묘지에 묻혔다. 아들의 집 근처다. 그의 관에는 이렇게 쓰였다. "미스터 모 뱌오 린, 1966-2020."
친구가 죽은 그날, 친씨는 자정 넘도록 뜬 눈으로 그의 생각들을 긴 이메일에 담아 밀스 변호사에게 보냈다.
"지금 저는 하늘에 대고 묻곤 합니다. 린의 꿈을 이루도록 해놓고, 이젠 그를 데려가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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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엔 린씨가 친씨에게 자존감을 되찾게 해준 것 같아요." 2019년 린씨를 인터뷰했던 비영리기관의 자원봉사자 레베카 쿠니가 말했다. 쿠니는 두 사람 모두와 알고 지냈다. "마치 린씨가 친씨에겐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해주는 과정의 일부인 것 같았습니다." ... "두 사람은 모두 큰 고통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우정을 내어줄 여유가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올봄, 린씨의 기일에 친씨는 지하철을 타고 벨뷰로 갔다. 근처에 공원 벤치가 있는 곳이다. 가까운 친구와 나눴던 '의식'은 친구가 떠났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친씨는 향을 피우고 린씨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꺼냈다. 프렌치프라이, 콜라, 그리고 맥도날드 피쉬버거다. 친씨는 장례 후 린씨의 틀니를 챙겼다. 조금 섬뜩해도 상관없다. 친구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 틀니를 음식 옆에 놓았다.
친씨는 친구의 이름을 몇 번 크게 외쳤다. "린, 린, 린." 그리고 그는 피쉬버거를 먹었다. 그가 점심을 마무리할 때까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린씨의 점심 식사였다.
친씨는 한동안 벤치를 떠나지 못했다.
- 이 기사를 쓴 샘 돌닉(Sam Dolnick) 뉴욕타임스 기자는 한국으로 치면 '편집국 부국장'쯤 되는 Deputy Managing Editor를 맡고 있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막내급의 사건팀 기자가 썼을 법한 '미담' 기사를 썼다. 깊이 취재해 내놓은 결과물은 약 4000단어, 22000자 이상의 기사였다. 이런 부류의 기사를 많이 쓰는 한국의 기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샘은 취재 후기를트위터에 자세히 남겼다. 후기를 소개하자면, 팬데믹 초기, 한 독자가 일종의 제보를 남겼는데, 이민자 노숙인 모 린에 대한 것이었다. 제보는 다섯 문장 정도로 한 남자에 대해 묘사하고 있더랬다. "린씨의 특별한 재능은 그의 인내심"이라고 한 문장이 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샘은 곧장 취재를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고 했다. 린씨를 아는 몇 사람들은 그의 친구에게 전화해보라고 했고 그가 바로 친씨였다. 소개해준 이들은 하나 같이 친과 린이 항상 함께 했다고 했다.
-연락이 닿은 친씨는 린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런데 샘은 오히려 친씨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고, 첫 번째 대화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에게 흥미가 생겼지만, 친씨에 대해 알기는 어려웠다.
-친씨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샘을 안내해 뉴욕 곳곳을 다녔다고 했다. 차이나타운의 식료품점과 조용한 공원, 가장 좋아하는 벤치. 그러면서 샘은 불완전한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법원 기록과 이민서류, 경찰 보고서와 오래된 사진들을 확인했다. 변호사와 활동가들을 취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비밀과 부끄러움, 좌절로 가려졌던 세계가 드러나고,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던 게 두 사람의 우정이라는 것이다.
-"뉴스는 거의 우정(friendship)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샘은 팬데믹으로 시달렸던 이들이 우정의 가치를 알게됐고, 이 기사에 보낸 여러 반응들도 우정의 중요함을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샘은 Redemption에 관한 궁금증이 떠오른다고 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 구원해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는 의미로 이 Redemp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구속'(救贖)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사전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구원함"이란 뜻이다.) 우정이 지난 과오를 덮어줄 수 있을지, 샘은 많이 생각했고, 린씨와 친씨도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사연 취재는 보통 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럴듯한 미담으로 빠르게 정리해 버린다. 그런데 이 기사는 일종의 미담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민 제도와 이민자들의 삶,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모습, 이해하기 힘든 노숙인들의 우정 같은 다양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변호사, 활동가를 만나 인터뷰하고 문서들을 확인해 빈틈을 메워 좀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기사를 쓰려면 취재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이야기를 다룰 공간, 즉 분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담 사례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려면 펼쳐낼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기사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친씨가 지난 시절 저지른 잘못을 무턱대고 덮어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두 사람의 우정이 남긴 어떤 여운을 독자들도 되새겨 보길 권하는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우정 이야기를 담담하게 다루는 점에서 기자의 글쓰기 솜씨가 눈에 띈다. 아주 긴 글이지만 술술 읽힌다. 번역으로 소개하기 위해 중간 중간 생략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여진 글이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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