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인 나에게,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
1900년생 강버들과 1982년생 김지영,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으면서 『82년생 김지영』 책이 떠올랐다.
강버들은 1917년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지주와 결혼해서 풍요롭게 살 수 있는데다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와이에 가보니 실상은 전혀 달랐다. 지주라고 믿었던 남편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이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던 옷이고 신발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양반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억울함과 제대로 끼니를 때울 수 없는 끝없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며 도망치다시피 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사진결혼을 거부했던 남편의 마음을 알고 상처를 받으면서 시작부터 하와이에서의 삶은 끝없는 난관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집안일에 시아버지 뒷바라지는 물론, 세탁 일을 하며 조선에 있는 친정 식구들에게 돈을 보냈다. 겨우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았더니, 그 사람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처자식을 두고 멀리 떠나서 버들은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정을 지키게 되었다. 하와이 내 조선인들도 이승만과 박용만 두 파로 나뉘어 조선과는 무관하게는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박용만 파인 남편 때문에 이승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따돌림도 당해야 했다. 악착같이 바느질과 세탁소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을 하다 망가진 몸으로 돌아온 남편을 거두고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면서 몸이 부서져라 살아냈다. 마흔이 넘어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카네이션 농장을 얻었다. 다른 사람의 힘이 아닌 자기 힘으로 타향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로서뿐만 아니라 아내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으로서 만만했던 시간은 한 순간도 없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에게 버들처럼 살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 인생을 포기할런지도 모른다.
한편,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역시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아 기르는 1982년생 김지영을 생각해 보면, 언뜻 강버들의 인생이 훨씬 더 힘겨워 보인다. 단순하게 비교해 보면 애를 다섯 키우며 어쩔 수 없이 고된 일까지 해야 하는 강버들과 아이 하나를 키우며 자기의 꿈과 인생을 위해서 일 하려고 하는 김지영 중 누가 더 힘들다고 말할 지는 뻔하다. 김지영에게 아이 하나 낳아 키우면서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거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까페에 가는 엄마들을 보고 맘충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이들도 아직 있겠지.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뒷자리에 앉은 나 들으라는 듯 팔자 편하게 놀러 다니는 엄마들은 좋겠다고 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2년생 내 막내 동생의 인생을 비추어 보면 김지영의 인생도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동생은 1남 3녀 사 남매의 막내로 딸 부잣집 셋째 딸이었음에도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막내라는 이유로 양보를 강요받았다. 아빠는 일 하느라 집에 거의 없었고, 엄마는 늘 오빠와 언니들을 챙긴다고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아서 막내는 혼자 집을 지킨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이것도 내가 30대 후반이 돼서 뒤늦게 동생한테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셋째까지 뒷바라지하느라고 엄마는 늘 넷째는 곁에 두고 있었지만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1998년 IMF 사태가 터져 가세가 심하게 기울면서 막내는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기 용돈을 벌었고,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5년을 앞서 태어난 덕으로 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른 채 대학생활을 즐겼는데 말이다. 지금도 동생은 아이 둘을 키우면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단 나보다는 좀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엄마인 것은 틀림이 없다. 나를 반성하게 하고 참 부끄럽게 만드는 동생이다.
어느 누가 한 여성을 엄마로서 혹은 주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잘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순위를 내보려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시대가 다르고 주어진 삶의 무게가 차이가 날 것이며, 그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가 모두 다를 것인데, 여자의 일생을 어떻게 함부로 점수를 매길 수 있단 말인가.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세 친구 버들과 홍주, 송화를 보자. 함께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갔지만, 전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각자 주어진 삶을 살았다. 버들은 공부하고 싶었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면서,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가정을 지켜냈다. 홍주는 조선에서 첫 결혼에 실패하고 하와이에서 재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 잘 살았다.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는데, 남편이 조선에 처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조선에 돌아가 첩으로는 살 수 없어서 남편과 아들을 조선으로 보내고 하와이에 남았다. 남편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떠나보낸 아들이 내내 가슴에 걸려서 멍울이 되었다. 그렇다고 삶은 끝나지 않았고 계속 이어졌다. 미국 현지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로즈라는 새 이름이 생기면서 부동산 임대업을 하며 경제적으로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송화는 사진신부로 와서 딸을 낳았지만, 샤먼의 피를 거부할 수 없어 받아들이고 조선으로 돌아가 무당이 되었다. 태어나서 하와이로 갈 때까지 자신의 인생을 한 번도 선택한 적 없던 그녀가 딸은 하와이에 두고 조선으로 향한 것도 옳다 그르다의 단순한 잣대만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최선을 다해 지켜 나갔다. 송화가 하와이에 두고 간 딸 펄은 버들의 딸이 되었고, 홍주의 딸이기도 했다. 엄마가 반드시 단 한 명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을 벗어나서, 1952년생 나의 엄마와 1977년생이며 역시 엄마인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우리 엄마는 8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울면서 보냈다. 남편이 죽었다는 충격도 있었겠지만, 엄마의 존재 이유나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아빠는 살가운 남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술을 마시며 술 주정을 부리는 아빠 때문에 엄마는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황혼이혼 이야기를 수시로 꺼냈었다. 간암이 생긴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두 달 만에 저세상으로 떠난 아빠의 빈자리가 그렇게나 컸던 건가. 옆에서 밥 달라고 하고 챙겨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는 당신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했다. 자식을 넷이나 낳았고 열심히 키웠으며 다들 잘 살고 있는데도 남편의 자리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약인지라 지금은 마음은 좀 나아졌는데, 엄마는 몸이 너무 쇠약해졌다. 척추측만증에 디스크까지 와서 그조차도 조금만 무리하면 며칠을 끙끙 앓아누워 있다. 지난 8년 사이에 지나치게 늙어버린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를 부탁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에타상 앞에서 차마 하지 못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는 말이 떠오른다. 엄마는 이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보다 내려놓고 쉬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결혼하고 신혼부터 고모 둘을 키우다시피 데리고 살았고, 자식들 넷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열 개씩 싸느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하며 열심히 젊은 시절을 살았으면 됐다. 서울로 유학간 자식들을 위해 양손 가득 반찬통을 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면서 몇 년을 보냈으면 충분히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남은 인생을 즐기면서 건강하게 보낼 방법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30대는 두 아들의 육아와 가사로 인한 우울증을 핑계로 현실을 피하려고만 했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겨우 눈을 제대로 뜨고 귀를 환하게 열면서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 책을 읽으면서 여자로서 엄마로서 내게 주어진 이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가야할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나아가야겠다.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 모두 주어진 삶을 살아내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엄마’라는 이름을 함께하고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 순간 파도가 밀려와도, 더한 고통이 와도 피하지 않고 맞닥뜨리는 우리 엄마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