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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화샘 지연 Jul 20. 2024

[인문학 기행](1) 2020 망우리공원 인문학 여행

서울시교육청 학부모지원센터 학부모리더교육 독서여행 자료집에 실린 나의 글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책과 함께 걷는 인문학 여행

- 망우리공원 곳곳에 숨어있는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본다



망우리라… 20여 년 전쯤 광진구 중곡동에 살 때 그리 멀지 않았던 망우리는 공동묘지로 기억되는, 내 상상 속에서는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좋은 기회로 찾게 되었다.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의 안내가 함께한 독서 여행이었다. 작가는 망우리공원 곳곳에 잠들어있는 근현대사 인물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비명(碑銘), 즉 묘비에 새겨있는 글을 읽고 자료를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망우리공원의 가치를 알리고,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수도(首都) 도심에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서 이곳의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탐방 루트 : 오전 10:00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 앞 집결.

→유명인사 사진가벽→유관순(이태원합장비)→감상용 시인→지석영→한강전망대→이인성 화백→도산 안창호→유상규→아사카와 다쿠미→방정환→한용운→조봉암→이중섭 화백→ 박인환 시인→ 관리사무소 복귀(13:00)



늦가을 맑은 날의 공원 산책이자, 평지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걷는 운동이기도 했다. 3시간을 줄곧 걸었으니 운동이라고 할만 했다. 일석삼조쯤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다녔어도 공원 안의 모든 묘지들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다. 아쉬울 따름이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오르막길을 30 미터쯤 올라서면 유명인사 사진가벽과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 망우리 공원 인문학 길 ‘사잇길’”이라고 씌어있는 석조 바닥이 기다리고 있다. 공원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를 듣고, 단체사진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세워진 곳이다. 유관순 열사는 순국 후 연고가 전혀 없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36년 이태원에 있던 묘지를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함께 모셔다고 한다. 어느새 올해가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라고 하니, 더 숙연한 마음이 든다. 동행하신 선생님들과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그 어떤 곳에서는 평안히 지내소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계단도 잘 만들어놨고 관리가 잘 된 공원이라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이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올라가는 길 왼편에 “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경서노고산천골합장비)”라고 적힌 비석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서울 서쪽 노고산 공동묘지를 없애면서 나온 무연고 뼈를 망우리로 옮기고 세운 합장비다. 김영식 작가는 여기서 비명(碑銘)에 씌어있는 모든 말들에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것만 제대로 풀이할 수 있다면 우리 역사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텐데,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진리다.  


이곳은 유명인사나 문학인만 잠든 곳이 아니다. 망우리공원에는 현재 묘가 7천 여기가 있다고 한다. 이 안에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영생도 함께한다. 특히 1933년부터 1973년까지 돌아가신 서울 시민 중, 고향에 묏자리가 없는 분들이 잠들어있다고 한다. 망우리공원은 우리 역사상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한국전쟁, 그리고 빈곤 속의 산업화 시대를 살아낸 분들의 공간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간직한 곳이라고 한다. 


다시 완만한 길을 오르다가 내려다보면 월파 김상용 시인의 묘지가 가을 오전의 햇살을 받고 서 있다. 이 시인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시구 “왜 사냐건 웃지요.”가 들어있는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썼다. 

비석 뒷면에 새겨 있는 시가 기억에 남는다.


향수

인적 끊진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고향(김상용의 고향은 경기 연천)이 왜 없겠냐마는 ‘있지도 않은 고향’이란 빼앗긴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이겠지.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종두법을 보급한 의사 지석영 선생.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마마라고 불린 천연두(두창)의 공포로부터 백성을 살린 분.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한글 연구에도 매진했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겼지만 나라 뿐만 아니라 우리 얼이 담긴 우리 글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분들이 있어서 한글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등산 코스라고 해도 될 만한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김영식 작가의 말대로라면 3분 정도의 거리지만, 개인차 심함) 한강전망대가 나온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난(?)을 견디고 맞게 되는 달콤한 눈 호강이랄까. 한강전망대에 서면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강과 어우러진 탁 트인 광경이란…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일대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다는 요충지이기도 한 이곳에 서서 과거를 그려보고,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때, 한 동행인이 거창에서 사과따기 체험활동을 했다면서가져온 사과를 한 쪽씩 나눠 주었다. 깨끗이 씻어서 겉껍질도 그냥 먹어도 된다고 준비해 오셨다. 사과가 맛있는 건지, 그 장소가 맛을 더해주는 건지 아무튼 그 사과는 평상시 먹었던 사과 이상으로 달콤하고 아삭아삭했다. 


사과의 달콤함은 가슴에 담아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직 여정이 남아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이인성 화가가 잠든 곳이다. 이인성은 당대 이중섭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천재 화가인데, 그만큼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단명해서 더욱 그러할진데, 천재인 반면 성격이 괴팍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경찰과 시비가 붙어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묘지 옆에 그의 대표작 ‘해당화’가 자라고 있다. 아직 피지 못한 꽃이 이인성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묘터와 태허 유상규 묘소 앞에 이르렀다. 묘터는 뫼를 쓸 자리고, 묘소는 뫼가 있는 곳이다. 유상규가 먼저 망우리에 안장되고, 안창호 선생은 38세 별세 때 자신의 비서이자 애제자 유상규가 묻혀 있는 망우리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에는 묘소만 있다. 1973년 도산공원으로 안창호의 묘가 옮겨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던 김영식 작가는 도산기념관에서 보관중인 석비라도 망우리 묘터로 옮길 것을 서울시에 청원해서 그 뜻을 이뤘다고 한다. 그래서 안창호와 유상규 두 사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동무와 함께 누웠으니 든든해서 좋으시겠다.


조금만 내려오면 일본인의 묘가 있다. 웬 일본인. 일제 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속 공간에 웬 일본인이란 말인가. 그가 이 땅에 묻히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을 연구한 민예가일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잘 하고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의 이웃으로 살며 조선의 마음에 접한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의 흙이 됐다고 김영식 작가가 전한다. 조선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일본인이었던 게다. 이곳에 뼈를 묻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공원 산책길을 걷다 보면, 오른쪽 언덕에 소파 방정환선생의 묘가 보인다. 이곳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명당이 아닐까 싶다. 햇볕이 가득 드는 언덕 묫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방정환 선생을 찾는 이도 가장 많다고 한다. 아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없던 시절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동화구연에도 능했다는 방정환이 발행한 ‘어린이’ 잡지는 당대에 인기가 엄청 많았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남기고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린이 운동뿐만 아니라 천도교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정말 대단한 분이다. 방정환의 묘 근처에는 후배인 최신복의 부모와 부인까지 가족이 함께 묻혀있다고 한다. 이 세상의 인연을 저 세상까지 이어가고픈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이겠지. 안내판에 “나는 누구 옆에 묻히고 싶으며 그 누가 내 옆에 묻히고자 할 것인가.”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가? 고민해 볼 일이다.


만해 한용운의 묘에 올랐다. 시 ‘님의 침묵’으로 너무나 유명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인 한용운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자식까지 있다. 개인사라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지만, 동행한 우리 선생님들이 전부 여자라서 그날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유일하게 남자인 김영식 작가가 한용운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당황하며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다.


다시 걷다 보면,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꺽인 그날 아래 우뚝 선 둥그런 돌에 조봉암 선생의 어록이 씌어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당시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와 시대적 당면과제에 뜻을 나타낸 말이지만, 이 말은 우리 인생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만하다. 무엇을 하든 경제성이나 가능성 있는 일에만 도전할 일이 아니라 옳은 일에 도전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옳은 일이란 무엇이며, 옳다는 것의 판단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산길을 내려가며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이중섭 화백의 묘를 만났다. 생전에 소나무를 사랑했던 이중섭을 위해 지인들이 그의 묘 옆에 소나무를 심어주었다 한다. 이중섭은 소나무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데, 가까이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비석에는 두 아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멀리 따ᅠ갈어져 있는 아들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제주도의 이중섭 거리와 이중섭 박물관은 볼거리가 가득한 반면 그만큼 보고 지나치는 것이 많았지만, 이곳 이중섭 묘지에서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이중섭을 가슴 속으로 만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풍만함이 있어서 좋다.


마지막 코스인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 시인의 묘지. 몇 년 전에 인제에 있는 박인환 문학관에 들른 적이 있다. 거기서는 다양한 모습의 박인환을 만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저 묘와 비석에 씌어있는 <세월이 가면>의 시구를 만날 수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인제에서 박인환 묘를 인제 문학관으로 이관하자고 하는데, 김영식 작가가 박인환의 아들에게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울에 남아야 찾는 이들도 많고 좋지 아니하냐고 술도 사고 계속 설득중이라고 한다. 그래, 이곳 망우리공원에 다른 예술가들과 역사 속 인물들과 계속 함께하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월이 가면’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인문학 여행을 마쳤다. 


아, 김영식 작가가 선물이 있다고 했다. 사실, 걷는 내내 김영식 작가의 뒤를 쫓으며 작가의 낡은 백팩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책 한 권도 들어있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에 납작한 가방 속에는 도무지 뭔가가 들어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뜻밖의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박인환 시인의 묘지석에 새겨있는 글귀를 찍은 사진 엽서였다. 뒷면에는 김영식 작가의 사인이 함께였다. 


詩人 朴寅煥之墓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와 나 사이를 걷다- 망우리 비명(碑銘)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책은 세 번째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김영식 작가는 앞으로도 망우리에 잠든 역사적 인물이나 민초들의 삶과 죽음을 연구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개정판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 페르라세즈 공동묘지는 유명 관광지가 된 지 오래다. 마카오 신교도 묘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우리 망우리공원 역시 위의 두 곳에 비해 역사문화적 가치가 떨어지는 곳이 아닌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라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 역시 망우리공원을 그저 공동묘지 쯤으로 알고 있던 터라 부끄럽다.


김영식 작가는 대학시절 망우리 근처에 살았다고 한다. 작가는 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시작해 보니 이곳이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한 곳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외국여행을 가면 여행지의 사진을 공개하며 뽐내는데, 자기가 태어난 혹은 일상을 보내는 소중한 곳에 대해서는 관심이 아예 없거나 무시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곳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나도 우리 주변이나 내 고향을 좀 자세히 오래도록 찾아보고 둘러봐야겠다.


그리고, 다시 우리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망우리공원에 가야겠다. 처음 찾은 오늘은 근처에 다 와서도 길을 헤매느라 오래 걸렸지만, 다시 가면 잘 찾아갈 자신이 있다. 모든 게 처음이 어려운 것이리라. 곧 다시 만날 망우리공원과 그곳에 잠들어계신 분들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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