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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잃고 찾은 감각

흐려서 더 좋은 것도 있다

by 글린더

어린 시절 언니오빠들이 안경을 쓴 모습이 꽤 멋있어 보였다.

엄마에게 안경을 사달라 하고 싶어도

너무나도 좋은 시력에 달리 핑계가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 몰래 도둑고양이처럼 오빠언니의 안경을 껴보며 어질어질한 세상을 경험해 보았다.

그 재미에 안경을 끼면 세상이 재미나게 보이는 줄만 알았다.


어느새 안경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의 안경이 가장 두꺼웠고 아이들에게 가장 재미난 놀림거리가 되었다. 안경과 함께하는 세상은 예상보다 재미있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안경 없이 보는 세상은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스스로가 보는 것에 확신이 없어지고 답답하고 힘들어졌다.


학창 시절 그렇게 장난처럼 시작된 안경과의 인연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평생을 의지하며 함께 가고 있다.


어느덧 시력은 걷잡을 수없이 나빠져 눈앞에 있는 사물의 형체만 가까스로 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니 황당하지만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감각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처음엔 기억력이 강화되고 다음엔 후각 그다음엔 청각이었다.


최소한의 시력정보를 통해 들어온 상황은 그림처럼 통기억하여 상황을 되짚어보고 시각을 제외한 감각에 의존하여 사물을 찾았다.

그렇게 어느덧 '보물찾기'의 달인이 되었다.

아빠와 오빠가 숨겨둔 비상금은 모조리 내 레이더에 잡혔다.


나쁜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안경이 없으면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게 되었다. 대신 후각과 미각이 예민해져 맛있는 음식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다만 그것을 스스로 얻었다고 인정해 주기 전까지는 잃은 것에만 집착하기 쉽다.


아침 간밤에 벗어둔 안경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허우적대며 더듬더듬 주변을 뒤지다 문득 잊고 있던 다른 감각들을 소환했다. 그리곤 찾아낸 안경을 끼고는 감사한, 배운 점들을 꾸역꾸역 찾아본다.

그러고 나니 감정도, 감각도 차분하게 진정된다.


이 또한 감사하려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글린더(Gleender), 세상에 굴러다니는 작은 관심들을 '글'을 통해 '블렌딩'하여 마음과 감성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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