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책 사다 놓고 안 읽는 사람 호칭 정하기' 란 제목의 글을 봤다. 트위터의 한 유저가 '책 사다 놓고 안 읽는 사람' 호칭 정하기 대회를 열었고, 그에 다른 유저들이 내놓은 기막힌 답변들을 캡처한
글이었다. '소장학파', '출판계의 빛과 소금', '집책광공' 등 센스 넘치는 호칭을 보며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마스크 안으로 킥킥 대며 웃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호칭은 '소장학파'였다. 언제나 비장한 마음으로 책을 구매하지만, 한 두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책장에 고이 모셔두는 나 같은 사람들은 책장에 책이 쌓일수록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나를 '소장학파'라는 멋들어진 말로 규정지으니, 단순히 책을 사놓고 읽지 않는 사람이 아닌 나만의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책을 소장하는 사람이 된 거 같았다. 한 마디로 좀 있어 보였달까.
나는 책을 구매하는 기준이 까다로운 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작가의 책이나 관심 있는 주제, 도서관에 없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주로 구매한다. 그중에서도 비문학에 비해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할 가능성이 큰 소설이나
에세이는 먼저 읽은 책 중 소장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만 구매하는 편이다. 책을 구매하는 기준이 높아 몇 번이나 장바구니에 읽고 싶은 책을 뺏다 넣었다 고민하지만, 막상 책이 오면 잘 읽지 않고 굳이 또 다른 책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이 나도 참 웃기다.
분명 책을 살 때는 그 순간에 가장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책을 받아본 순간 귀신같이 다른 책에 더 눈이 간다.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에서 추천해 준 책, 북스타그램 피드에 자주 올라오는 책 등 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책의 축복은 끝이 없다. 그렇게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책들을 몇 권씩 빌려 읽다 보면 어느새 새로 산 책은 잊히고 흥미가 뚝 떨어지고 만다.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책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잡은 물고기에는 떡밥을 주지 않는다'처럼 나는 '구매한 책에는 쉬이 눈길을 주지 않는다'를 실천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어제 '북클럽 문학동네' 웰컴 키트가 도착했다. 집에 오니 한참 고민하다 어렵게 정한 선택 도서 <가녀장의 시대>와 <인생의 역사>가 날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책장에 두 책을 꽂아 놓으려는데, 아직 읽지 않은 작년 선택 도서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책이 내게 말을 걸리 없지만 왠지 "쟤는 또 뭐야. 나는 잊은 거야?" 따져 묻는 거 같았다. 심지어 내 방엔 더 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어 동생 몰래 동생 책장에 책을 꽂아놓고 나오다 딱 걸려
제대로 한소리 들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다시는 네 책장 안 쓴다! 씩씩대며 방에 돌아왔는데 읽지 않은 책들로
방이 어지러운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책장 정리를 할 때마다 매번 다짐으로만 끝났던 '책장 파먹기'를
이제는 진짜 해야 할 때가 온 거 같다. 조금만 방심하면 새로운 책에 한 눈 팔기 쉬우니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있는 책부터 사랑해 줘야지. 이래놓고 하루 만에 이웃 블로거님의 책 리뷰를 읽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해
동네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해 본 건 아무래도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