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이 신지, 영화 <이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 가족이 뾰족한 삼각형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여느 가족의 평범한 식사 시간처럼 보이지만, 자꾸만 엇갈리고 어긋나는 부부의 대화 속에서 이들의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식탁 주변에 감도는 어색한 기류를 눈치챈 열세 살 소녀 렌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띄워보지만, 한 번 멀어진 부부의 거리는 좀처럼 다시 좁혀지지 않는다.
영화 ‘이사’는 부모의 이혼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 렌이 겪는 성장통을 환상적인 연출과 섬세한 감정 묘사로 담아낸 작품이다. 1980~9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이끈 거장 소마이 신지 감독의 대표작으로, 한국에서는 오는 7월 23일 국내 첫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렌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따를 정도로 당차고 쾌활한 소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예상치 못했던 부모의 이혼 앞에서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혼란스러운 렌과 달리, 렌의 부모는 이미 서로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출발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빠 켄이치는 세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새집으로 이사하고, 엄마 나즈나는 렌과 함께 가정을 잘 꾸려가기 위해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을 담은 ‘가족 계약서’를 작성한다.
순식간에 렌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엄마와 아빠는 렌과 달리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가끔 쓸쓸해 보이고 어딘가 반쯤 나사가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예전과 다를 거 없이 렌에게만큼은 다정하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다시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는 렌은 집에 있는 이혼 서류를 감추고,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만의 일인 시위를 벌이는 등 제 나이대에 맞는 깜찍하고 엉뚱한 방법으로 다가오는 이혼을 막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애를 쓸수록 어쩐지 부모의 갈등은 더 심해져 간다. 결국 화장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렌을 앞에 두고, 부모는 그간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리며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다. 화장실에서 그들의 다툼을 듣던 렌은 서러운 목소리로 왜 나를 낳았냐고 외친다. 그 한마디 속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것도 모자라, 부모의 갈등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의 억울함과 서글픔이 담겨 있다. 또, 한 편으로는 나의 존재로 인해 부모가 더 불행해진 게 아닌가 하는 이유 모를 죄책감도 스며들어있다. 엄마, 아빠와 한집에 사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나의 세계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인 렌의 모습은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겪어본 유년기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화장실에서의 일인 시위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렌은 세 가족이 함께 웃을 수 있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최후의 시도를 감행한다. 가족과 함께 종종 방문하곤 했던 ‘비와호’로 부모님을 몰래 초대해 행복했던 옛 순간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간 뒤, 상심한 렌은 여름 불꽃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호수 주변의 작은 마을을 정처 없이 배회한다. 이때 그녀가 달빛 아래 비탈진 산길을 오르며 보내는 하룻밤은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꿈속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신비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다음 날 아침, 바닷가에 도착한 렌은 바다에 떠 있는 장엄한 용선과 함께 그 주변에서 즐겁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가족의 환영을 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선은 불타 없어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부모님 역시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렌은 부모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한다.
렌은 영화 내내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렸다. 새집으로 이사 가는 아버지를 붙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었고, 실험실에 불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찾아온 엄마를 피해 또다시 달렸다. 내 앞에 닥친 어려움을 직면하기보다는, 멀리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 믿었던 렌의 미숙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렌이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던 때는 그가 걸음을 멈추고 앞에 놓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였다. 전날 우연히 만난 한 노인은 렌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기억에서 네가 필요한 건 한 손으로 헤아릴 정도면 된단다.” 아무리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거기서 머무를 수 없으며,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적당히 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렌은 세 가족이 함께여서 즐거웠던 순간을 과거에 두고, 불확실한 미래로 한 걸음 내딛길 선택한다. 어쩌면 렌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부모의 재결합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시련을 받아들일 줄 아는 단단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개의 소중한 추억을 손안에 꽉 쥔 채 더 이상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 렌은 그렇게 유년기라는 인생의 한 단계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