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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니 Jan 02. 2022

한 해를 떠나보내며

티격태격 변호사 가족 이야기

올 한 해 몇몇 엄청 감사할 이슈들이 있었고,
코로나 상황 중에 가족들 한번 코로나 검사도 없이 평안히 지낼 수 있는 것 자체도 너무나 감사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우울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삶 자체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라는 게 존재하기가 어려우니까. 있다 해도 아주 찰나의 순간인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경탄하는 순간,
신에게 내 영혼을 의탁하는 순간,
잠든 자녀의 토실토실한 뺨에 뽀뽀하는 순간,
가까운 사람과 마음이 소통되는 순간,
진심으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이런 것들이지만, 모두 짧은 찰나의 순간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여기저기 몸이 쑤시고,
어렵고 골치 아픈 사건들을 검토하고,
울분에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집으로 사무실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월평균 6-70건씩의 사건들을 진행하고,
수많은 판결문들을 들여다보며,
역시 나라는 사람은 뭔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판결문을 쓰는 일을 직업적으로 한다면?
상상만 해도 괴롭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조정위원이라는 자리는 나에게 잘 맞는 자리인 것 같다.
어떤 판단 없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듣고, 공감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간 해왔던 일처럼 투사가 돼서 싸우지 않아도 되어서.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했고, 대부분의 또래들이 당연히 판검사 임용을 목표로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인 것 같아 공부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같은 연수원 꼴찌 클럽이
과분하게도 법원에서 상임 조정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후배님들은 못할 것이 없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나고 보니, 나는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그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닌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찌 보기엔 반항이거나 방황이었을 그 과정이,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었던 거다.

최근 변협에서 각 판사님들에게 개별적으로 법관평가표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는 판사님이 굉장히 노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그만큼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항상 잘해 오던 분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한 편이 되는 것 같다. 특목고, SKY 대학 출신들은 되게 자존감이 높을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본다.
오히려, 늘 경쟁하고 평가받는 환경에 익숙하다 보니, 조금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쉽게 실망하고 우울감에 빠지거나, 반대로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이런 면에선 한 번 바닥을 쳐본 경험이 있다면, 어차피 더 내려갈 일도 없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다.


사법고시를  준비할까말까 고민하던 대학생 시절, 대학원생들이 전문적으로 해주는 적성 및 성격테스트를 받아보았더니 법조인과 정반대 성향이 나왔다. 과연 시험준비를 해야하나? 고민중에 어떤 법철학 고전 서적을 읽었는데, 꼭 이성적이고 냉철한 법률가만 있어선 안된다. 공감하고 따뜻한 법률가도 있어야한다는 내용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 나는 나의 감성과 공감능력으로 따뜻한 법조인이 되어보자. 나는 남들보다 절반만큼의 소질밖에 못 갖고 있겠지만 노력해서 그 절반의 100%를 발휘할 수 있다면, 100%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절반만큼 노력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건조하고 호흡이 긴 법률문서를 읽어내고 무언가를 판단하는 일이 괴롭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 애써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 있다.

다시 한 해의 마지막 날로 돌아와서,
삶이 나 자신, 내 소명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면,
내가 찾아왔고, 나에게 주어진 이 자리,
이 순간에 더 진심으로 충실히 임해보자.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세계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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