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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니 Aug 14. 2022

INTP 아들의 수련회 참가기

티격태격 변호사 가족의 일상

다음은 중2 아들의 교회 수련회 참가 후기입니다(아들이 동생에게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엄마인 제가 각색해서 썼습니다).


나는 감옥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수련회 버스를 기다렸다.  엄마가 하필이면 교회 선생님이라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야 한다. 난 참 운도 없다.


컴퓨터도 아이패드도 없는데 가서 뭘 하지? 에잇. 책이라도 싸가야겠다. 엄마한테 보조가방을 달라고 해서 책 열 권을 욱여넣었다. 엄마가 무겁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꿋꿋이 버텼다.

버스를 타고 수련회 장소에 도착했다.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전부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했다. 헐. 책이라도 안 싸왔으면 어쩔 뻔. 난 역시 천재다.


다른 애들은 서로 친한 것 같다. 나한테 말 거는 애도 없고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 평소에 동생이 한 명만 깊게 사귀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에라. 책이나 읽자. 두꺼운 세계 2차 대전 책을 꺼내 읽고 있었더니 어째 애들이 나를 더 멀리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등이 근질근질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벌레라고 했다. 으악. 펄쩍펄쩍 뛰며 소리 질렀더니 여자 선생님이 손으로 꺼내서 밟아 죽였다. 애들이 3년 전에는 샤워실에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겁을 줬다.

집에 갈 때까지 샤워도 하지 말고 ×도 싸지 말아야겠다.


오자마자 무슨 팀빌딩이라며 조별로 게임을 하자고 한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왜 개인 자유시간은 하나도 없고 다 단체로 해야 하는 거냐.


드디어 저녁시간이다. 오 내가 좋아하는 닭고기와 잡채다. 간식으로는 포켓몬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이건 나쁘지 않은데?


이제 캠프파이어를 한단다. 내 평생 이렇게 큰 불은 처음 봤다. 알코올인지 기름인지를 부었더니 불꽃이 하늘까지 닿았다. 불꽃을 따라 하늘을 보니까 별이 엄청 많았다. 우와. 이건 인정! 진짜 멋있었다. 마시멜로도 구워 먹었다. 닭꼬치도 인생 존맛이다.


친구도 한 명 사귀었다. 사실 친구는 아니고 한 살 동생인데 나랑 코드가 잘 맞았다. 여기는 감옥 같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것도 똑같고 mbti도 나랑 똑같은 intp다.


둘째 날이다. 다들 물놀이랑 축구를 한다. 나는 그 친구랑 몰래 여기저기 다녔다. 어떤 할아버지가 구석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우리끼리 쓰레기를 태웠다. 죽은 개구리도 태웠다. 재밌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놈들!"하고 달려오셨다. 얼른 도망쳤다.


다시 돌아오니까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랑 수박 멜론 파인애플 라면 파티가 벌어졌다. 오늘 밤에는 야식으로 치킨을 준다고 한다. 오예!


저녁예배를 드렸다. 목사님 말씀이 끝났는데 또 찬양을 시작한다. 그런데 다들 뛰고 난리다. 당황스럽다. 기차놀이도 한다. 나는 친해진 동생이랑 둘이 뒤로 빠져서 구경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전자기타를 이빨로 물어뜯는다. 전도사님이 랩을 한다. 오. 쫌 한다.


예배가 드디어 끝났다. 무슨 예배를 4시간씩이나 하냐. 치킨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나가버렸을 거다. 엄마한테 치킨은 언제 나오냐고 두 번이나 물어봤다. 역시 밤에 먹는 치킨은 진리다. 엄마가 선생님들 것까지 뺏어서 나눠줬다. 역시 우리 엄마 최고!


그런데 오늘은 밤을 새도 된다고 한다. 개꿀이다. 엄마가 맨날 일찍 자라고 잔소리해서 짜증 났는데. 엄마 표정을 힐끗 보니 웃고 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드디어 집에 간다. 엄마가 선생님들과 같이 밥 먹고 가자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난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야 하니까.


참. 엄마한테 다시는 수련회에 안 간다고 단단히 얘기해 두었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도 싸니 살 거 같다. 역시 집이 최고다.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 엄마가 수련회 때 들었던 찬양을 틀어놓았나 보다.


"엄마! 나 그거 다윗처럼 춤출 거야 틀어줘!"

엄마가 틀어줬다. 어깨춤이 절로 난다. 동생도 까불까불 춤을 춘다.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 같이 춤을 췄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거 같다. 재밌었던 것도 같다. 엄마의 신나는 얼굴을 보니까 나도 신난다.

"우리 아들 수련회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이제 다 컸네. 기특하다."

엄마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엄마도 고생 많았어."

나도 엄마 어깨를 토닥였다.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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